[천자칼럼] 하이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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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피녀(彼女)들의 ‘하이힐’이 더한층 가벼움을 늣길 때가 왓다. /육색(肉色)의 ‘스터킹’ /극단으로 짧은 ‘스카트’.”(1933년 김기림 ‘봄의 전령-북행열차를 타고’ 중에서) 여성의 옷차림에서 먼저 계절을 느끼는 것은 예나 지금이나 같다. 시인 김기림도 짧은 스커트, 스타킹과 더불어 하이힐을 ‘짙은 에로티시즘과 발랄한 흥분’이라고 표현했다.
여성의 하이힐(high heel)에 대한 로망은 남성의 이해수준을 넘어선다. “지미추를 처음 신은 순간, 넌 네 영혼을 악마에게 판 거야.”(‘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섹스 앤드 더 시티’에서 주인공 캐리가 강도에게 외치는 말은 더 노골적이다. “펜디 백이나 반지, 시계는 다 가져가도 좋으니 제발 마놀로 블라닉만은 건드리지 말아주세요.”스틸레토(굽이 뾰족한 힐)를 신으면 마술처럼 몸매가 달라진다는 사실을 여성들은 본능적으로 안다. 뉴욕에선 스틸레토를 신기 위해 ‘레그 워크’란 준비운동이 유행할 정도다.
하이힐의 원조는 16세기 베네치아를 꼽는다. 에두아르트 푹스의 《풍속의 역사》에 따르면 당시 하이힐은 두 가지 용도였다. 오물로 뒤덮인 길을 건너는 실용적 용도와, 몸매를 최대한 돋보이게 하는 미적 용도다. 하이힐을 신으면 엉덩이가 올라가고 넘어지지 않기 위해 배를 들이밀고 가슴은 내밀게 돼 풍만함이 두드러지게 된다는 것이다.
과거 하이힐은 여성의 전유물이 아니었다. 17세기 절대왕정 시대에 태양왕 루이 14세의 초상화는 초핀(굽 높은 슬리퍼)을 신은 모습이 대부분이다. 귀족들 사이에 초핀이 유행하며 굽이 최대 40㎝에 달한 적도 있다. 굽높이가 곧 신분의 상징이었다. 프랑스혁명 이후 굽이 낮아졌지만, 1970년대 들어 디스코 열풍 속에 잠시 남성 하이힐이 유행하기도 했다.하이힐은 대개 굽이 7~8㎝인데 10㎝를 넘으면 킬힐(kill heel)이다. 세계 톱모델들이 20㎝ 이상인 킬힐로 런웨이를 걷다 넘어지는 일도 다반사다. 하이힐은 발가락이 휘는 무지외반증, 하지정맥류, 요통 등을 유발해 ‘현대판 전족’이란 악명이 높다. 그래선지 올해 단화가 유행이고, 이른바 ‘운도녀(운동화 신고 출근하는 도시여성)’도 늘고 있다.
최근 프랑스에서 남성들이 하이힐을 신은 여성에게 호의적이란 연구결과가 나와 흥미롭다. 하이힐 여성이 장갑을 떨어뜨렸을 때 남성이 주워줄 확률이 단화를 신은 여성보다 50% 높았다고 한다. 여성이 하이힐을 포기 못 할 만하다. 미(美)는 고통에 비례하는 것일까.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