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적 꺾인 명품들, 자존심도 꺾었다

인사이드 스토리

버버리, SPA브랜드 옆에 뷰티박스 1호점 개점
구찌, 백화점에 카페 열고 면세점 중가 브랜드 구역에
페라가모, '급낮다' 무시하던 온라인복합쇼핑몰 입점
멀버리·질 샌더·막스마라, 백화점 세일 단골 손님
포화상태 명품시장 "체면보다 실리로 살 길 찾을 수밖에…"
버버리의 화장품 브랜드 버버리뷰티박스가 오는 15일 국내에 상륙한다. 국내는 물론 아시아 1호점이지만, 이 매장은 백화점에 들어가지 않는다. 지난달 27일 재개장한 서울 삼성동 코엑스몰에 들어선다. 버버리뷰티박스 매장 인근에는 제조·직매형(SPA) 브랜드 조프레시 등이 있다.
그동안 해외 명품 브랜드들은 의류·가방·화장품을 막론하고 고급스러운 이미지를 부각하기 위해 첫 매장을 백화점에 내는 게 관례였다. 버버리가 ‘명품 1호점=백화점’ 공식을 깬 것은 실적 부진 때문이다. 버버리코리아의 지난해 영업이익은 전년도에 비해 5.2% 감소했다. 기존 명품 소비자층이 에르메스·샤넬처럼 최고가 브랜드로 이동하거나 아니면 중가 컨템퍼러리(신흥) 브랜드로 옮겨간 탓이다.명품 업체들이 실적 회복을 위해 안간힘을 쓰고 있다. 기존에는 ‘급이 낮다’며 무시했던 온라인 유통에 기대고, 인근 브랜드의 위상을 따지지 않고 매장 입지를 결정하는 등 ‘자존심’을 버리고 소비자 끌기에 발벗고 나서는 모습이다.

구찌는 지난달 16일까지 현대백화점 무역센터점 1층에 임시 매장인 ‘구찌 카페’를 열었다. 국내 명품 브랜드 중 백화점에 카페를 연 첫 사례다. 구찌는 2012년 2558억원이던 매출이 지난해 2425억원으로 감소했다. 롯데·신라면세점 본점의 잡화 브랜드 매출 순위에서도 지난해부터 동시에 5위권 밖으로 밀려났다.

구찌는 롯데면세점 김포공항점에서는 제이에스티나, 투미, 코치, 레스포삭 등 중가 브랜드들과 같은 구역에 있다. A백화점 관계자는 “명품 브랜드들은 보통 백화점·면세점 등에 들어갈 때 주변 브랜드의 위상을 깐깐하게 따지는데 구찌가 체면보다 실리를 택한 것”이라며 “초고가 제품 외에도 100만원 안팎 제품을 일부 배치해 중저가를 찾는 소비자층을 공략하고 있다”고 설명했다.페라가모 역시 옛 영광을 뒤로 한 채 실리를 좇고 있다. 페라가모는 지난 7월 신세계그룹의 통합 온라인몰인 SSG닷컴에 들어갔다. 명품 브랜드가 백화점·마트 등을 포괄하는 온라인 복합쇼핑몰에 입점한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멀버리, 막스마라, 질 샌더, 마이클 코어스, 비비안 웨스트우드는 이미 백화점 세일 단골 브랜드로 자리잡았다. 연 2회 열리는 명품 정기 할인(시즌오프) 외에 주요 백화점이 기획하는 각종 행사에 재고를 없애려고 꼬박꼬박 참여하고 있다. 명품 브랜드들은 보통 브랜드 가치를 높이기 위해 ‘노세일 전략’을 편다.

한 명품 업계 관계자는 “한국 명품 시장은 해외 브랜드가 너무 많이 유입돼 이제 포화 상태가 됐다”며 “해외 직구(직접구매) 영향까지 겹쳐 어중간한 위상의 전통 명품들은 자존심을 버리고 준명품급의 자세로 고객층을 확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라고 말했다.

김선주/임현우 기자 sak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