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우리 딸 혹시 '제2 김연아'?…학원등록 전쟁 나서

들뜬 아이 얼굴에…새벽 줄서기 피로도 '싹'
자녀 방학 프로젝트

뒷바라지에 피곤
해외여행 스케줄 직접 짜줘…방학기간 '기러기族' 되기도

그래도 행복해요
주말 미술관 투어로 친해져…"다 해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일러스트=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니하오마.”

정보기술(IT) 관련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차장이 ‘큰딸은 중국어 천재’라고 생각하기 시작한 건 2010년이다. 여느 주말처럼 거실 소파에 기대 중국 무협 드라마를 보고 있는데 네 살배기 딸이 갑자기 중국어 비슷한 말을 내뱉은 것이다. 흥분한 김 차장은 그해부터 딸에게 중국어 조기 교육을 시작했다. 그 후로 5년. 김 차장의 기대는 여전하다. 이달 말 예정돼 있는 짧은 겨울 휴가도 기꺼이 아이 중국어 교육에 양보하기로 했다. 중국으로 가족 여행을 잡아놓은 것이다.12월부터 1월 말. 아이들에겐 설레는 겨울방학이지만 학부모에겐 머리가 복잡하고, 몸이 피곤한 기간이다. 평소보다 두 배가 더 들어가는 학원비와 현장학습비 때문만이 아니다. 아이들의 자질 개발과 특성화 교육 또는 색다른 즐거움을 위해 특별한 프로젝트를 시작해야 하기 때문이다. “아이를 위해서라면 이쯤이야”라며 돈과 시간, 열정을 투자하는 ‘열혈’ 김과장 이대리들의 겨울나기를 스케치해봤다.

주말 아침부터 학원 등록 전쟁

아이가 열 살이 되기 전까진 그래도 부모들은 ‘혹시나’ 하는 마음에 특성화 교육에 아낌없이 투자한다. 대형 건설사 김모 과장은 ‘제2의 김연아’를 꿈꾸는 아홉 살 딸을 위해 투자를 시작했다. 딸은 스케이트를 타는 김연아의 모습을 보면서 언젠가 ‘퀸’이 되고 싶다는 소망을 얘기해왔다. 김 과장은 김연아가 어릴 적 스케이트를 탔다는 아이스링크의 피겨 강습에 등록하기로 하고 토요일 아침부터 줄을 섰다. 접수 시작은 오전 9시. 혹시나 하는 마음에 한 시간 전에 도착했는데 벌써 수십m의 줄이 서 있었다. 겨우 등록을 마친 김 과장은 휴대폰 너머로 들리는 딸의 들뜬 목소리를 들으며 피곤을 달랬다.“솔직히 제 유전자를 닮았다면 운동을 해서 그다지 대성할 것처럼 보이지는 않습니다. 하지만 어쩌겠어요. 딸이 하고 싶어하는 건 다 시켜주고 싶은 게 부모 마음 아닐까요.”

금융지주 계열사의 박모 차장은 지난달부터 외동딸에게 ‘프로골퍼의 꿈’을 키워주고 있다. 딸은 태권도를 하다 최근 “다른 운동을 하고 싶다”는 얘기를 꺼냈다. 그때 떠오른 게 KLPGA 골퍼 김세영 선수의 얘기였다. “태권도 공인 3단인데 태권도를 하며 단련했던 하체가 장타를 치는 데 도움이 됐습니다.” 박 차장은 일단 실내 연습장 쿠폰부터 끊었다. 겨우내 실내에서 기초를 배우면 되기 때문에 겨울 운동으로도 ‘딱’이라는 생각이었다. “혹시 모르죠. LPGA 골퍼가 된 아이 덕에 제가 미국 여행을 할 수 있을지.”

체험학습 위해 여행 사이트 직접 훑어야아이들이 스포츠 등 특수 분야에 자질이 없다는 사실을 깨닫게 되더라도 김과장 이대리들이 포기하지 못하는 것은 ‘견문 넓혀주기’다. 그중에 으뜸은 해외여행 보내기다. 대형 금융회사에서 근무하는 워킹맘 양모 부장. 요즘 양 부장이 틈틈이 직원들 눈치를 보면서 훑고 있는 건 바로 여행 사이트다. 방학이면 진행되는 초등학생 딸의 그룹 여행 때문이다. 현장 학습, 해외 학습, 다양한 문화 체험 등의 이름으로 서로 친한 아이들을 중심으로 엄마까지 동반해 해외여행을 다녀오는 것이다. 한 번 집단이 형성되면 방학마다 돌아가면서 엄마가 주체가 돼 여행 지역과 일정을 짜야 한다. 여행사에 맡겨도 되지만 초등학생 특성에 맞춰 문화와 언어, 동선을 고려한 최적의 여행 스케줄은 엄마가 짜는 것만큼 좋은 게 없다는 것이 양 부장의 판단이다.

아이를 위해서는 하기 싫은 것도 챙겨야 하는 게 학부모의 숙명이다. 주말에 컴퓨터 앞에 앉는 걸 정말 싫어하는 중견기업 마케팅 부서의 박모 과장. 그는 작년 12월27일 토요일 아침부터 컴퓨터 앞에 대기했다. 초등학교 3학년 아이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 어린이 미술관 홈페이지에서 겨울방학 교육 프로그램을 예약하려는 것이었다. 그뿐 아니다. 자신은 미술, 음악엔 관심도 없지만 주말마다 시내 주요 미술관과 박물관 찾기를 거르지 않는다. “오전 일찍 전시관을 둘러보고 근처 맛 좋은 식당에서 점심을 먹어요. 아이 교육도 하고 더 친해진다는 생각으로 견디고 있습니다.”

방학엔 학원비 두 배…직접 과외하기도방학이라 더 힘든 김과장 이대리도 많다. 국내 자산운용사의 이모 팀장은 최근 아이의 학원을 끊었다. 학원들이 오전 특강을 만들어 학원비를 두 배로 올려서였다. 금융투자업계에 불고 있는 구조조정 한파에 월급 인상은커녕 자리 보전도 쉽지 않은 상황에서 교육비를 몇십만원 더 지출하는 게 큰 부담이었다. 그렇다고 원래대로 아이가 오후에만 수업을 들으면 특강을 듣는 아이들과 진도가 맞지 않아 들으나마나다. 대신 이 팀장은 비교적 저렴한 인터넷 강의를 신청했고 주말엔 직접 과외를 할 생각이다. “돈이 없어서 영어캠프는 못 보냈고요. 13월의 세금 폭탄도 우려돼 눈물을 머금고 학원을 끊었습니다.”

지방 소재 중공업회사에 근무하는 이모 부장은 매년 이맘때가 되면 아무도 없는 집으로 쓸쓸하게 귀가한다. 자녀들의 방학 때면 ‘단기 기러기 아빠’가 되는 것이다. 전업주부인 아내가 방학마다 두 자녀와 함께 필리핀 단기 어학연수를 다닌 지 벌써 3년째다. 아내는 비용을 아끼려고 동네 학부모들의 신청을 받아 어학연수를 원하는 아이에게 비행기 표부터 현지 홈스테이, 어학원 예약까지 대행해주는 ‘코디네이터’ 일도 하고 있다.

황정수/안정락/김은정/김대훈/김동현/김인선/추가영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