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융사 CEO 후보數·이력·사유 공개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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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융위, 지배구조 연차보고서 작성기준 논란금융회사들이 주주총회를 앞두고 지배구조 현황을 공시하는 ‘지배구조 연차보고서’ 작성 기준을 놓고 시끄럽다. 금융당국이 최근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를 이유로 최고경영자(CEO) 후보군을 사실상 개별 공개하도록 하면서, 내부 임직원의 ‘줄 세우기’를 조장하는 것 아니냐는 반발이 커지고 있어서다.
118개社에 지침…CEO·사외이사 추천인도 명시 요구
금융사 "임직원 줄세우기 조장…갈등만 초래" 반발
당국 "엄격한 기준 필요하지만 업계 의견도 수용 검토"
금융사 CEO와 임원, 사외이사 등에 대한 추천 이유와 추천한 사람까지 밝히도록 하면서 불필요한 ‘신상털기식’ 공시로 변질되는 것 아니냐는 우려도 나온다.○대기업계열 “인사권 침해 우려”
금융위원회는 작년 말 모범규준을 확정한 데 이어 이달 초 118개 금융사에 ‘지배구조 연차보고서 작성기준’이란 지침을 보냈다. 모범규준에 따라 매년 2~3월(주주총회 20일 전)에 회사 홈페이지 등에 공시해야 하는 연차보고서에 대한 작성 기준이다.
분량만 100페이지가 넘는다. 지난해 이른바 ‘KB사태’를 거치면서 금융사의 CEO 등 임원과 사외이사 선임·승계 등에 대해 꼼꼼히 따져볼 수 있도록 하겠다는 취지다.금융사들은 이를 바탕으로 150~200페이지 분량의 연차보고서를 작성, 공시해야 한다. 가장 논란이 큰 대목은 금융사의 CEO 승계 및 후보군 관리에 대한 지침이다. 금융사마다 CEO 후보군과 개별 후보의 이력, 사유 등을 담도록 했다. 사실상 CEO 후보군을 개별 공개토록 한 것이다.
한 금융지주 임원은 “이름을 별도로 적지 않더라도 CEO 후보 수와 개별 이력을 기재하면 알 만한 사람들은 후보군이 누군지 뻔히 알지 않겠느냐”며 “후보군이 드러나면 불필요한 임직원 ‘줄 세우기’나 ‘파벌’ 조성 등에 대한 우려가 커질 수 있다”고 지적했다.
대기업계열의 경우 대주주의 인사권이 침해될 소지가 있다는 지적도 나온다. 대기업계열 금융사의 한 임원은 “그룹 차원의 인사가 이뤄질 경우 개별 회사의 CEO 후보군과 상관없이 임명하거나, 위기 상황에서 외부 인사를 CEO로 영입해야 할 때도 있다”며 “획일적으로 후보군을 정해놓는 게 말이 되느냐”고 꼬집었다.○당국 “투명성 확보 실익 많아”
임원후보추천위원회(임추위) 구성이 의무화된 은행지주사와 은행들은 말이 더 많다. CEO 등 임원과 사외이사 등을 추천할 때 후보자의 능력과 기존 성과, 전문성뿐만 아니라 어떤 사람이 누구를 왜 추천했는지까지 명시하게 해서다. 사외이사는 연봉과 부가급여를 합친 개별 보수까지 공시하도록 했다.
금융사들은 시시콜콜한 ‘신상털기식’ 공시를 요구한다며 불만을 터뜨리고 있다. 한 시중은행 부행장은 “임원이나 사외이사 추천 이유와 경로를 자세하게 공개할 경우 경영진이나 사외이사 간에 예측하지 못한 갈등을 유발할 수 있다”고 말했다.산업 기업 우리 등 정부가 지분을 갖고 있는 은행들의 한숨 소리는 더 크다. 연차보고서 작성 자체를 불필요한 요식행위로 보고 있어서다. 해당 은행 관계자는 “정부가 은행 CEO와 주요 임원을 임명하고 있는데 100페이지가 넘는 연차보고서를 왜 만들어야 하는지 모르겠다”고 했다.
금융사의 반발이 커지자 은행연합회 등 일부 업권별 협회는 금융위에 연차보고서 작성 기준을 완화해줄 것을 요청했다. 금융위는 금융사의 지배구조 투명성 강화를 위해 이같은 기준이 필요하다는 입장이다. 다만 업계의 의견을 일부 수용하는 방안도 검토중인 것으로 전해졌다.
금융위 관계자는 “여러 통로를 통해 업계의 의견을 듣고 있다”며 “업계의 의견을 일부 받아들이는 방안도 고려할 방침”이라고 말했다.
장창민 기자 cmja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