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제주 흑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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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제주도 여행이 늘 설레는 것은 청정한 풍광에다 다채로운 음식이 있어서다. 가장 제주다운 먹거리가 ‘꺼멍도새기’, 즉 흑돼지 고기다. 자리돔젓을 곁들인 돔베고기(수육)는 별미 중의 별미다. 문화재청이 제주 흑돼지를 천연기념물로 지정 예고하자 당장 “이제 흑돼지 못 먹는 거냐”는 문의가 쏟아질 만했다. 천연기념물은 순수혈통 260여마리로 한정되고, 식용 유통되는 흑돼지는 무관하다니 다행(!)이다.
본래 재래종 흑돼지는 전국에 분포해 왔다. 고구려 때 만주의 돼지가 유입돼 토착종이 된 것으로 추정된다. 김천의 지례 흑돼지는 조선 때 임금 진상품이었다. 그러나 20세기 초 번식과 생장이 빠른 외래종이 들어오면서 급속히 사라졌다. 경제성이 떨어진 탓이다. 최근 들어 지리산 주변 함양 산청 남원과 김천, 홍천 등지에서 흑돼지를 되살려 지역 특산품으로 사육하고 있다.그중에서도 제주 흑돼지는 3세기 ‘삼국지 위지 동이전’에도 사육기록이 나올 만큼 유서 깊은 전통종이다. 육지와 격리된 환경 탓에 육지 흑돼지에 비해 작지만 민첩하며 귀가 짧고 위로 뻗은 게 특징이다. 몸 길이 90㎝, 무게 70㎏가량으로 일반 돼지의 3분의 2 정도다. 제주 풍토에 오래 적응하면서 면역력이 강해 구제역도 피했을 정도다.
흑돼지 하면 떠오르는 게 돌담으로 쌓은 ‘돝통’ 또는 ‘통시’(돼지우리 겸용 뒷간)다. 이곳에서 인분을 받아먹고 자라 제주에선 똥돼지라고도 부른다. 통시는 제주뿐 아니라 지리산 산골마을에도 있었다. 1970년대 관광지로 개발되면서 비위생적이란 이유로 제주 통시가 사라졌고 지금은 성읍 민속마을에서나 볼 수 있다.
제주민에게 흑돼지는 먹거리를 넘어 생활과 의례 자체다. 모든 행사가 돼지에서 시작해 돼지로 끝날 정도다. 혼례, 마을잔치나 당제, 유교제례에도 흑돼지를 썼다. 더구나 통시는 생태순환 면에서 재평가 받을 만하다. 통시가 없었다면 제주의 지질특성상 음식물 분뇨 등의 침출수가 스며들어 물이 오염됐을 것이란 얘기다.소중한 흑돼지였지만 수난도 길었다.1940년대부터 외래종 버크셔가 유입돼 교잡이 성행했고 70년대 고기량이 많고 새끼를 잘 낳는 외래종이 도입되면서 사육이 급감했다. 그러다 1986년 제주도 축산진흥원이 순수 혈통 흑돼지 5마리(수컷 1, 암컷 4)를 찾아내 대를 이어온 것이 이번에 천연기념물이 될 흑돼지다. 260여마리 천연기념물은 당시 ‘김문’이란 수컷의 후손이다. 진도개, 삽살이만큼이나 보존할 가치가 충분하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