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金과장 & 李대리] "밸런타인데이, 화가 난 데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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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의리 초콜릿' 받아놓고 화이트데이 때는 입 싹 닦는 남자 동료또 밸런타인데이(2월14일)다. 기원 후 269년 어느 날 남녀 간 사랑을 지켜주기 위해 순교한 성(聖) 발렌티노(Valentinus·밸런타인은 영어식 발음)를 기념하기 위한 날이라든지, 여성의 수줍은 사랑 고백일이라든지 하는 얘기는 직장인들에게는 아득한 전설처럼 들린다.
수제 초콜릿 건네주며 "××백 참 좋더라"…은근 강조하는 여친
밸런타인데'으리'?
우정 초콜릿으로 인맥 관리…몇 개 받았나, 인기 척도 되기도
솔로들 "진짜 남친에겐 언제쯤…"
이제 김 과장, 이 대리들에게 밸런타인데이는 초콜릿을 주며 설렘과 즐거움을 느끼는 날이라기보다 승진과 평판, 직장 내 인기를 결정짓는 또 하나의 시험날로 다가온다. 생각만 해도 머리가 지끈지끈 아픈 ‘밸런타인데이 증후군’에 시달린다는 사람도 많다. 선물 때문에 ‘스트레스 만빵데이’가 돼 버린 밸런타인데이. 이날을 맞이하는 김 과장, 이 대리들의 솔직한 심정을 들어봤다.밸런타인데이 스트레스는 누가 풀어주나요
금융공기업에 다니는 김모 과장(33·여)은 ‘의리 초콜릿’을 돌리는 일을 그만하고 싶다. 홍일점 막내 대리로 전입해 남자 선배들에게 정성스럽게 초콜릿을 만들어 돌리기 시작한 지도 벌써 4년째다. 애초부터 사모의 마음이나 연정과는 관계없는 일이었고, 기념일을 맞아 선배들에게 예쁘게 봐달라고 시작한 일이었다. 올초 과장 진급도 했고, 후배들도 늘어난 만큼 더 이상의 초콜릿 배달은 사양하고 싶다. 그러나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선배들은 다시 한마디씩 한다. “김 과장 올해도 기대할게요.”
직장 5년차인 강모씨(33·남)에게도 밸런타인데이가 고민이다. 강씨가 다니는 회사는 밸런타인데이나 화이트데이에 초콜릿과 사탕을 주고받는 일이 많다. 밸런타인데이 때 아침 책상에 놓인 초콜릿 개수를 마치 인기 척도로 삼는 분위기다. 강씨도 매년 밸런타인데이에 몇몇 후배 여사원들로부터 선물을 받았다. 그런데 매년 초콜릿 양이 줄어드는 것만 같다. 그는 올해는 초콜릿 몇 개를 사 와서 아침 일찍 누가 놓고 간 것처럼 ‘세팅’해 둘까도 진지하게 생각 중이다.한 중소 제조업체에 다니는 박모 과장(30·남)에게 밸런타인데이는 ‘존재 자체가 스트레스인 날’이다. 오랫 동안 여자 친구가 없는 박 과장에게 사람들은 밸런타인데이에 뭘 할지 꼬치꼬치 물어본다. 부모님과 가족들의 눈치도 봐야 한다. 집에 들어설 때 현관에서부터 손에 뭘 들었는지 ‘스캔당할’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머리가 지끈해진다.
“피할 수 없으면 즐겨라”
대기업 기획팀에 근무하는 이모씨(32·여)는 기념일을 기회로 만드는 스타일이다. 그는 밸런타인데이, 빼빼로데이, 크리스마스 등 기념일마다 직장 동료 30여명의 선물을 챙긴다. 밸런타인데이에 선후배들에게 주는 초콜릿은 ‘미래를 위한 투자’라는 게 그의 생각이다. 그는 이번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초콜릿뿐 아니라 개인별로 마스크팩, 카페 상품권, 홍삼음료, 친필카드를 꼼꼼히 준비했다. 시간과 돈이 좀 들지만 효과는 만점. 회사 사람들을 잘 챙겨 놓으면 1년 내내 고마워하면서 업무에도 도움이 된다.한 백화점의 여성 의류 층별담당자(FM) 임모 과장은 올해 밸런타인데이가 기대된다. 남성복 담당에서 여성의류 FM으로 자리를 옮긴 지 1년째. 그동안 그는 여성 판매직원들의 문화를 이해하기 위해 하루 한 매장씩 돌며 직원들의 고충을 들어주는 등 각고의 노력을 했다. ‘초짜’가 왔다며 텃세를 부리던 여직원들도 최근 들어 임 과장에게 마음을 여는 것 같다. “여성용품 층에선 밸런타인데이에 받는 초콜릿 개수가 관리자의 인기도라고 합니다. 올해 몇 개나 받을 수 있을지 기대돼요. 남성복 코너에서는 기대할 수 없는 일이고 처음 있는 일이어서 결과가 궁금해요.”
‘품앗이’ 초콜릿은 사절
한 대기업에 다니는 김모 대리(29)는 밸런타인데이를 앞두고 초콜릿을 만들어 주겠다며 은근슬쩍 말하는 여자 친구 때문에 고민이다. 여자 친구의 취미는 각종 베이킹. 정성이 곧 사랑이라는 여자 친구는 시나몬 가루와 카카오매스니 버터니 재료를 주문했다는데 정작 김 대리는 막대 초코과자(빼××)보다 맛있는 건 없다고 여길 정도로 초콜릿엔 문외한이다. 더구나 직장인인 여자 친구는 한 달 전쯤부터 품위 유지를 위해 이 정도는 필요하다며 어떤 가방이 맘에 든다고 수차례 말했다. 은근슬쩍 화이트데이 때 ‘답백(bag)’을 바라는 눈치임이 분명하다.금융회사에 다니는 5년차 직장인 김모씨는 최근 고민에 빠졌다. 보름 전 직장 동료 소개로 공기업에 다니는 한 남성과 소개팅을 했다. 첫인상이 나쁘지 않아 애프터 신청을 받아들였고 시간을 내 영화를 보고 다시 저녁 식사도 했다. 그런데 이 ‘소개팅남’이 딱히 사귀자는 말을 하지 않아 ‘썸’과 연애의 어중간한 형태로 시간이 흘러 버렸다. 김씨는 막상 밸런타인데이가 다가오니 초콜릿을 줄지 여부를 두고 고민에 빠졌다. 초콜릿을 주자니 앞으로의 관계를 결정할 중요한 기점이 될 것만 같다.
대기업에 근무하는 한모씨(31·여)는 ‘모태 솔로’다. 밸런타인데이를 맞아 초콜릿을 줄 사람이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다. 전에는 직장 선배들에게 하나씩 챙겨 주면서 ‘할 일을 했다’고 여겨왔는데 선배들은 초콜릿을 받아 먹을 뿐 답이 없다. 다시 ‘영혼 없는’ 선물을 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고민이다.
■ 특별취재팀 박수진 산업부 차장(팀장) 안정락(IT과학부) 황정수(증권부) 김은정(국제부) 강현우(산업부) 강경민(지식사회부) 임현우(생활경제부) 김대훈(정치부) 김동현(건설부동산부) 김인선(문화스포츠부) 추가영(중소기업부) 기자
김대훈 기자 daep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