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세 가장 은퇴자산 4억3000만원, 12년 후엔 완전 바닥 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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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없이 오래 사는 무전장수(無錢長壽) 시대은퇴생활자들이 가장 중시하는 것은 돈과 건강이다. 돈이 있어야 구차하지 않고, 건강해야 구질구질하지 않게 노년을 보낼 수 있다. 하지만 준비 수준은 다르다. 건강은 어느 정도 준비하고 있지만 자금 준비는 형편없다. 삼성생명이 지난해 1782명을 대상으로 은퇴 준비 수준을 조사해 ‘위험’ ‘주의’ ‘양호’ 등 3단계로 나눈 결과, 재무 부문은 50.5%가 위험 수준이었다. 반면 건강 영역은 25.8%만 위험 수준으로 평가됐다. 이런 준비상태라면 돈 없이 오래 사는 ‘무전장수(無錢長壽)시대’는 길어질 수밖에 없다.
(1) 준비 안 된 은퇴…재취업 내몰리는 은퇴생활자
은퇴 후 月 최소 211만원 필요
병원비·자녀 결혼 등 지출 땐 고갈 시점 훨씬 더 빨라질수도
빚내서 생활하다 다시 일터로…은퇴→자금고갈→재취업 악순환
은퇴 자금 얼마나 빨리 사라지나서울 등촌동에 사는 이모씨(57)는 2013년 은행에서 명예퇴직했다. 나름대로 전문성이 있었던 터라 중소기업 등에 금방 재취업이 될 줄 알았다. 하지만 아니었다. 이런저런 이유로 재취업이 쉽지 않았다. ‘어~어~’ 하는 사이 퇴직 2년이 다 돼 간다. 그 사이 퇴직금을 곶감 빼먹듯 까먹고 살았다. 이 기간 1억여원의 퇴직금이 사라졌다.
통계청 가계금융·복지조사(2014년)에 따르면 50대 가구주의 가구당 평균 총자산은 4억3025만원(주택 포함)이다. 55세 직장인이 은퇴해 이 돈으로 살아갈 남은 인생을 그려보자. 당장 생활비가 은퇴 자금을 갉아먹기 시작한다. 삼성생명 은퇴백서(2014년)에 따르면 가구당 필요 최소 생활비는 월 211만원이다.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 62세 전까지 7년간 써야 할 돈은 1억7772만원이다.
자녀 결혼비용과 교육비도 뭉텅이로 빠져나간다. 자녀 한 명만 결혼시켜도 1억1899만원(듀오, 2015년 결혼비용 실태 보고서)이 든다. 교육비(삼성생명 은퇴백서)까지 더하면 1억5499만원이 필요하다.겨우 버텨서 월 85만원씩(20년 이상 가입 기준) 국민연금을 받을 수 있는 62세가 됐다고 하자. 그래도 생활비는 월 126만원씩 적자다. 다시 은퇴통장(남은 자산 9802만원)에서 돈을 빼 쓰면 5년이면 고갈되고 만다. 은퇴 후 12년이 지난 67세 때다. 기대수명인 85세(통계청, 2013년 생명표)까지 남은 18년간은 국민연금 하나로 살아야 한다. 은행 정기예금 금리가 연 1%대인 점을 감안하면 돈을 불리기도 쉽지 않다. 여기에는 병원비 등 긴급자금이 빠져 있다. 이를 고려하면 은퇴 자금 고갈 시점은 오히려 빨라진다. 자칫하면 20년 이상을 무전장수해야 하는 상황을 맞닥뜨릴 수 있다.
빚은 느는데, 갚지 못하는 은퇴생활자들
중소기업에 다니다 퇴직한 뒤 대구에서 식당을 운영하는 최모씨(72)는 2013년 7월부터 대출금 연체를 시작했다. 영업이 시원찮았던 데다 생활비와 병원비 부담이 상당한 탓이었다. 최씨는 결국 원금과 이자 등 1450만원을 갚지 못해 지난해 초 신용불량자가 된 뒤 부랴부랴 신용회복위원회에 개인워크아웃을 신청했다.은퇴 후 특별한 소득이 없는 사람은 ‘큰일’이 없기를 바라면서 버텨야 한다. 수술비 등 큰돈이 필요할 경우 어쩔 수 없이 빚을 낼 수밖에 없다. 통계청에 따르면 60세 이상 가구주의 가구당 평균 부채는 지난해 4372만원으로 2013년보다 4.1% 늘었다. 전체 가구당 부채 증감률(2.3%)의 두 배에 가깝다.
하지만 이를 갚을 능력은 현저히 떨어진다. 신용회복위원회에 따르면 60세 이상 개인워크아웃 신청자 수는 2010년 3420명에서 지난해 4811명으로 늘었다. 개인워크아웃은 빚 갚을 능력이 안되는 사람에 대해 이자 전액과 원금의 최대 50%를 탕감하고 나머지는 장기간에 걸쳐 나눠 갚게 하는 제도다.
결국 은퇴자금을 다 까먹은 뒤 겨우겨우 살다가 목돈이 필요하면 빚에 의존해야 하는 것이 은퇴생활자들의 모습이다.자식 도움 못 받아…다시 일터로
대기업 임원까지 지낸 박모씨(64)는 택시 운전을 한다. 여기저기 일자리를 알아봤지만 그래도 박씨를 받아주는 곳은 아파트 경비원과 택시기사 두 곳뿐이었다. 경비원은 급여가 뻔했으나, 택시기사는 하기 나름이었다. 박씨는 “택시기사 수입으로 생활비를 충당하니 은퇴자금을 보전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씨 같은 사람이 늘어나면서 60세 이상 취업자가 증가하고 있다. 지난해 연령별 취업자 수를 보면 60세 이상이 348만명이었다. 2013년보다 20여만명 늘었다. 증가폭으로만 보면 50대(23만9000명) 다음으로 많았다.
이렇게 보면 ‘은퇴→은퇴자금 고갈→재취업 시도나 부채에 의존’이라는 악순환 고리가 은퇴 예정자들을 기다리고 있다고 할 수 있다.
1억1622만원30세인 사람이 하루 한 갑씩 피우던 담배(4500원)를 끊을 경우 60세까지 모을 수 있는 돈(수익률 연 5% 가정). 이 돈으로 30년간 연금을 수령하면 매달 63만원을 받는다. ‘시가렛(cigarette) 효과’다.
김일규 기자 black0419@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