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철수의 데스크 시각] 전세가율 90%의 비밀

김철수 건설부동산부장 kcsoo@hankyung.com
“수도권에서도 전셋값이 집값의 80~90%에 달한 아파트가 적지 않습니다. 그런데도 집을 살까 말까 저울질하는 세입자들이 상당합니다. 예전 같으면 은행 빚을 내서라도 바로 집을 구입했을 텐데 말이죠.”

얼마 전 한 부동산 관련 모임에서 만난 60대 주택 임대사업자 김모씨는 요즘 부동산시장에서 기존 상식으론 이해하기 힘든 부분이 적지 않다고 했다. 꺾일 줄 모르는 전세가율(주택 매매가격 대비 전세가격 비율)을 대표적인 ‘상식 파괴’로 꼽았다.1990~2000년대 부동산 전업투자자로 활동한 김씨에게 ‘전세가율 60%’는 시장 규칙이었다. 2008년 금융위기 이전까지만 해도 전국 평균 전세가율이 60% 내외에 이르고, 전세가율 70%를 넘는 개별 아파트 단지들이 등장하면 전세입자들 상당수가 적극적인 매매 수요자로 돌아섰다. 매매가격을 밀어올리면서 전세가율은 다시 낮아지는 과정을 반복했다.

“저성장 속 집값 급등 어렵다“

금융위기에 이은 부동산시장 침체를 거치면서 종전 전세가율 규칙은 깨졌다. 2011년 60%를 넘어선 전국 아파트 평균 전세가율은 작년 말 70%를 돌파했다. 올 들어 그 비율은 더 높아져 2월 말 현재 70.6%에 달했다. 개별 아파트를 보면 서울·수도권에서도 전세가율 90% 초과 단지가 속출하고 있다. 전세보증금에다 돈을 약간만 더 보태면 집을 구입할 수 있는 상황인데도 차라리 전세로 눌러앉겠다는 수요자가 다수라는 것이다.집 사는 걸 왜 주저하는 걸까. 무엇보다 앞으로 집값이 크게 오르기 힘들 것이란 인식이 깔려 있다. “작년 한 해 서울 전셋값이 4% 이상 오르는 동안 주택 매매가격 상승률이 0.8%에 그친 건 기존 주택으로 시세차익을 얻기 어려워졌다고 생각하는 세입자가 그만큼 많다는 의미다.”(박원갑 국민은행 수석부동산전문위원)

집값도 결국은 경제성장률과 소비자 물가에 수렴할 수밖에 없는데 올해 국내총생산(GDP) 증가율은 3%대 초반, 소비자 물가는 1%대에 머물 것으로 전망되는 점도 집값 상승 기대감을 낮추는 요인이다. 초고속 고령화, 생산 인구 감소, 양질의 일자리 부족 등 일본의 ‘잃어버린 20년’을 닮아가고 있다는 우려도 그 밑바탕에 자리하고 있다.

‘미친 전셋값’이라는 건 없다주택에 대한 감가상각 개념이 명확해진 것도 금융위기 이전과 다른 점이다. 2000년대 중반까지만 해도 지은 지 15년이 넘어가면 재건축 추진 소식이 전해지며 집값이 반등하는 단지가 적지 않았다. 이젠 서울 목동 강남 등 집값이 높은 일부 저층 단지를 제외하고 이 같은 기대를 낳는 곳은 거의 사라졌다. 1980년대 중반 이후 건립된 아파트의 대부분은 15층, 용적률 200%가량의 중층 단지여서 재건축을 통해 추가로 확보할 수 있는 용적률이 과거에 비해 크게 줄어들었다. 재건축을 위한 조합원 분담금이 그만큼 늘어날 수밖에 없는 구조다.

시장은 모든 구성원의 지식과 판단을 화학적으로 소화해 현상을 빚어낸다. 시장이 예측의 영역이 아닌 대응의 영역이라는 얘기도 그래서 나온다. 부동산시장도 마찬가지다. 일부 언론이 지적한 ‘미친 전셋값’이란 그런 측면에서 없다. 집주인과 세입자, 정책입안자 등의 지식과 판단의 용광로 속에서 등장한 게 ‘전세가율 90%’다. 예측할 수 있는 한 가지는 있다. 아파트는 투자 상품이지만 집은 가족의 보금자리라는 점이다.

김철수 건설부동산부장 kcsoo@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