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과 맛있는 만남] 고영회 대한변리사회 회장 "푸대접 받는 국내 기술자 현실…대기업 뛰쳐나와 변리사 도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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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수 고시생 때 돈고생·맘고생…역경 이겨내니 인생밑천 되더라"못다 핀 ‘이공계의 꽃’
건설사 다니며 사우디 파견
중동건설 침체로 해고바람
기술직 처한 현실에 좌절도
변리사로 제2의 인생
대한기술사회 창립 등 활동
“한경 스트롱코리아 기사 감명받아
이공계 처우개선하자 다짐했었죠”고영회 대한변리사회 회장(57)은 일반인이 하나도 따기 어려운 전문 자격증을 세 개나 갖고 있다. 건축시공과 건축기계설비 분야에서 ‘이공계의 꽃’이라 불리는 기술사 자격을 각각 땄다. 서른아홉 살 때 특허 등 지식재산 분야의 변호사로 불리는 변리사 시험에도 합격했다. 모두가 부러워할 전문 자격증을 두루 갖췄지만 정작 본인은 그리 자랑스럽게 여기지만은 않았다. 부실한 과학기술 분야 전문가 제도 때문에 자꾸 새로운 자격시험에 매달렸다는 게 그의 설명이다.
작년 3월부터 대한변리사회를 이끌고 있는 고 회장을 서울 종로구 인사동 한정식집 ‘장자의 나비’에서 만났다. 대한변리사회는 내년이면 70주년이 된다. 전체 회원은 4000여명에 달한다. 변리사로 활동하는 변호사 500여명도 회원이다. 장자의 나비는 그가 4년 전부터 시내에 약속이 있을 때 자주 찾는 단골집이다. 한식 반상은 물론 굴보쌈, 코다리찜 등 전통 음식의 맛을 느낄 수 있어서다. 고 회장은 “단골 손님에게만 내놓는 가양주(家釀酒·집이나 가게에서 직접 빚은 술)를 맛볼 수 있는 게 숨은 매력”이라며 “지금까지 먹어 본 술 가운데 가장 맛있다”고 말했다.
○취업 2년 만에 사우디 근무 자원고 회장의 주량은 막걸리 한 주발 반, 소주 한 병 반이다. 그는 자리에 앉자마자 막걸리부터 주문했다. 안주로는 굴보쌈을 시켰다. 고 회장은 “배춧속에 굴보쌈을 싸서 막걸리 안주로 먹으면 ‘숨이 넘어간다’”고 했다.
고 회장은 경남 진주에서 태어났다. 고등학교 때까지 나무지게를 지고 다닌 시골 출신이다. 진주를 떠난 것은 서울대에 진학하면서다. 자연계열로 입학한 뒤 2학년에 올라가며 건축학을 전공으로 선택했다.사회에 첫발을 디딘 것은 졸업을 2개월 앞둔 1980년 말이다. 미륭건설(현 동부건설)에 입사했다. 입사 2년도 안 된 1982년 4월에는 중동 근무를 자원했다. 사우디아라비아의 제다 직업훈련원 공사장에서 3년3개월간 현장 기사로 일했다. 고 회장은 “대학 1학년 때 아버지가 폐암으로 돌아가셨는데 그때 쌓인 집안 빚이 많았다”며 “국내에서 월급 30만원을 받을 때 사우디에선 90만원까지 받을 수 있어서 빚을 갚는 데 큰 보탬이 됐다”고 떠올렸다.
삶에 큰 변화가 생긴 것은 귀국해서다. 중동 건설 경기가 나빠지자 많은 회사가 구조조정에 나섰다. 미륭건설도 예외는 아니었다. 대리 직급인 고 회장은 대상이 아니었다. 하지만 선배 엔지니어들을 내보내는 방식을 지켜보면서 직장에 대한 애착이 떨어지기 시작했다. 그는 “부서장들이 사람을 자르는 게 힘들다 보니 출장을 갔거나 유능해 다른 곳에 가기 쉬운 사람부터 내보냈다”며 “회사의 핵심 엔지니어들을 너무 쉽게 자르는 것을 보면서 직장인으로 출세할 꿈을 접었다”고 말했다.
새로운 경험을 위해 중소 건설사로 옮기기도 했다. 하지만 엔지니어에 대한 처우는 별반 다를 게 없었다. 회사의 성장 비전도 보이지 않았다. 고 회장은 “전문성을 인정받기 위해 자격증을 따야겠다고 결심했다”며 “정시 퇴근 후 집에서 저녁을 먹자마자 독서실로 가 기술사 시험을 준비했다”고 했다. 건축시공, 건축기계설비 두 분야에서 연이어 기술사 자격증을 땄다. 당시 기술사 자격시험 합격률은 2% 남짓일 정도로 통과가 쉽지 않았다. 하지만 ‘하늘의 별따기’인 자격증을 갖고 있어도 달라진 것은 많지 않았다. 기술사의 고유 업무 영역도 없고 시험을 거치지 않아도 같은 대우를 받는 일명 ‘인정 기술사’가 마구 쏟아져 나왔다.○변리사 도전과 함께 찾아온 시련
옛날 얘기를 하며 막걸리 몇 주발을 비우자 장자의 나비 주인이 고 회장을 위해 청주를 내왔다. 주인이 직접 막걸리를 걸러 만든 술이다. 은은한 빛깔과 감미로운 향이 어디서도 쉽게 찾아볼 수 없는 풍미였다. 코다리찜, 황태구이 등 새로운 안주까지 나오자 청주가 더 당겼다.
고 회장이 변리사에 도전한 것은 1993년, 서른일곱 살 때다. 오랜 이공계 경력에 법 지식을 보태 전문가로 활약하기에 적합한 분야라고 판단해 공부를 시작했다.
늦은 나이의 도전부터 쉽지 않았는데 가정에 시련까지 닥쳤다. 독서실에서 밤늦게 돌아와 보니 네 살배기 큰딸이 갑자기 피를 토했다. 원인을 알 수 없이 갑자기 출혈이 멈추지 않는 현상이다. 한 달에 한 번씩 병원에 입원하는 일이 반복됐다. 이때 둘째딸이 태어났다. 시골에서 농사 짓던 어머니가 올라와 둘째를 보살폈는데 1년 만에 중풍으로 쓰러졌다. 고 회장은 “빚을 내 살아야 했는데 월말 통장 잔액을 볼 때면 공부가 되지 않았다”며 “세상에서 가장 큰 고생이 돈고생이란 것을 깨달았다”고 했다. 하지만 소중한 경험으로 기억했다. 그는 “가족들이 함께 어려움을 이겨낸 고마운 경험이었다”며 “그 정도 어려움은 다시 닥쳐도 전혀 겁낼 게 없다는 자신감을 얻었다”고 말했다.
변리사 시험에 합격한 것은 도전 3년째인 1995년 말. 그해 응시자는 5000명이었고 최종 합격자는 30명에 불과했다. 200 대 1에 가까운 경쟁률이었다. 고 회장은 “다행히 그해 합격자 가운데 1958년생 동갑이 한 명 있어 최고령 합격자라는 불명예는 피할 수 있었다”며 웃었다.
○전문가 제도 개선에 대한 사명
변리사 합격 후 고 회장은 성창특허법률사무소를 개업했다. 이제 됐나 싶었지만 또 다른 좌절감을 느껴야 했다. 변리사법 8조에는 ‘특허 사건에 대해서는 변리사가 소송을 대리할 수 있다’고 규정하고 있다. 하지만 특허침해 민사소송에서는 변리사의 대리권을 인정받지 못하고 있다. 변호사가 없으면 재판받을 수도 없다. 변호사에게 변리사 자격을 자동 부여하는 제도도 이해할 수 없었다. 어려운 시험을 거치는 이공계와 비교할 때 특혜라는 주장이다.
“왜 변리사 시험까지 보게 됐을까?” 고민을 시작한 것도 이때부터다. 그가 찾은 이유는 엔지니어가 제대로 대접받지 못하는 사회 제도와 문화였다. 직장에서 인정받았다면, 기술사로 성공했다면 변리사 시험까지 볼 필요가 없었기 때문이다. 전문가 제도를 개선하는 활동에 나선 이유다.
때마침 2002년 한국경제신문이 이공계 인재 육성을 위해 ‘스트롱코리아’ 캠페인을 시작하자 더 용기를 냈다. 그는 “스트롱코리아 기획 기사를 보고 주변 기술사, 변리사 동료들과 감동하고 열광했다”고 떠올렸다. 이공계 처우 개선에 대해 언론에 기고하고 각종 토론회에 빠지지 않고 참석했다. 2003년에는 동료들과 함께 만든 대한기술사회가 정부 인가를 받아 초대 회장으로 활동했다.
2010년 서울고등법원에서 있었던 재판 때는 소송대리권을 인정하지 않은 재판부에 항의하는 표시로 검은 양복과 넥타이를 매고 법정에 나가기도 했다. 잘못된 것을 발견하면 어떻게든 고쳐나가려는 그만의 고집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고 회장은 “변리사는 이공계 전문가인데 변호사와 비교하면 얼마나 푸대접 받는지 알 수 있다”며 “변리사 시험을 보는 것보다 로스쿨에 가는 게 유리하면 누가 이공계 전문가의 길을 선택하겠느냐”고 되물었다.
술자리가 무르익자 주인은 흥이 나서 숨겨둔 소주를 꺼내왔다. 소주 역시 가게에서 직접 담근 술로 아무에게나 주지 않는다. 알코올 도수가 40도를 넘어 고량주를 마시는 것처럼 목이 따끔했다. 하지만 잡냄새 없는 깔끔한 맛이었다.
독한 술에 흥이 오르자 고 회장이 건배사를 제안했다. “얼씨구, 절씨구, 지화자, 좋~다.” 노래도 한 곡 뽑았다. “울도 담도 없는 집에 시집살이 삼 년 만에~”로 시작하는 민요 진주난봉가였다.
고 회장은 한글 바로 쓰기, 고유문화 배우기 등에도 남다른 관심이 있다. 1999년 이오덕 선생의 ‘우리말 바로쓰기’를 읽은 후 부끄러움을 느껴 공부도 하고 한글 바로 쓰기 운동에도 참여하고 있다. 그의 앞에서 파이팅 같은 외래어를 쓰면 핀잔을 들을 수도 있다. 고 회장은 “과학기술자 제대로 대우하기, 한글 바로 쓰기, 우리 것(고유문화, 예술, 사상) 제자리 찾기 등 세 가지가 해결돼야 한국이 선진국이 될 수 있다고 믿는다”며 “내가 좀 끈질긴 성격인데 해결될 때까지 포기하지 않을 것”이라고 강조했다.■ 고영회 회장의 단골집 장자의 나비
배춧잎에 굴보쌈 듬뿍…전통 막걸리도 일품
서울 종로구 인사동에 있는 한정식집이다. 좁은 골목길을 몇 차례 지나야 찾을 수 있다. 한정식과 안주 메뉴는 인사동 다른 밥집과 크게 다르지 않다. 하지만 나물, 열무김치 등 기본 반찬이 깔끔하고 주인이 단골에게만 자랑하는 전통 막걸리가 맛있다. 묵직한 나무 탁자와 황토벽, 전통악기 등으로 꾸며진 내부는 시골집에 온 듯한 편안한 느낌을 준다. 인사동에서 골동품점을 함께 운영하는 주인장의 솜씨가 돋보이는 장식이다. 장자의 나비를 운영한지는 13년째다. 주황빛 전등 아래에서 반가운 얼굴과 마주앉아 얘기하다 보면 20~30년 전으로 돌아간 듯한 착각이 든다. 주메뉴는 정식 차림(1만3000~2만원)이다. 조기, 계란찜, 청포묵무침, 잡채, 도라지무침, 열무김치, 비름나물, 가지나물 등 20여 가지 반찬을 맛볼 수 있다. 안주로는 삼합, 굴보쌈, 낙지소면, 황태구이, 삶은 오징어 등이 있다. (02)738-6782
■ 변리사, 평균 매출 1위…특허출원 대리업무 수행변 리사는 특허, 상표 등 기업의 지식재산권(IP) 확보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최근 각광받는 직업 중 하나다. 특허 출원을 대리하고 분쟁 때는 컨설팅도 해준다. 국세청이 매년 발표하는 직업별 평균 연간 매출(사무소 기준)은 6억원대로 변호사(4억원대)보다 많아 1위다. 실소득은 5~10년차 변리사 연봉이 평균 8000만~1억원 정도인 것으로 알려졌다. 현재 등록된 변리사는 8000여명.
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