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정생활보다 사내 정치가 더 어려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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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중심 조직 문화, 인맥 관리 등 어려움…절반 이상 "여자니까 더 노력해야"“너무 이 악물고 살지 마세요.” 어느 날 치과를 찾은 한 여성 임원에게 치과의사가 심하게 마모된 어금니 사진을 보여주며 건넨 조언이라고 한다. 직장 생활을 하면서 가정에서는 아내로, 엄마로 살아가느라 매일매일을 ‘어금니 꽉 깨물고’ 살아온 흔적인 셈이다. 여성 임원들의 커뮤니티인 ‘WIN(위민인이노베이션)’ 홈페이지에 실린 사례 중 하나다.
일과 직장, 두 마리 토끼를 잡기 위해 매일같이 전쟁 중인 국내 여성 임원들의 진짜 삶은 어떨까. 국내 기업과 여성 임원 커뮤니티 WIN에서 모두 50명의 여성 임원이 설문에 참여했다(복수 응답). 인생의 우선순위는 일 > 가정
여성 임원들에게 ‘직업’은 어떤 의미를 지니고 있을까. 51%의 응답자가 자아를 실현하기 위한 통로의 의미가 가장 크다고 답했다. 엄마·아내가 아닌 개인으로서 독립성을 확보하기 위해 일이 중요하다는 응답도 20.4%에 달했다. 업무 능력을 통한 사회 기여(18.4%), 생계를 위한 수단(8.2%)이 그 뒤를 이었다. 이들이 직업을 선택하는 데 가장 중요한 조건으로 꼽은 것 역시 이와 일맥상통한다. 급여(2%)나 정규직·비정규직 고용 형태(2%)와 같은 현실적인 조건들보다 업무의 자율성과 성취감(71.4%)을 중요한 조건으로 꼽았다. 적성(22.4%)을 꼽은 이들도 적지 않다.
그렇다면 국내 여성 임원들이 일과 자신의 인생에서 우선순위를 두는 것은 무엇일까. 59.2%가 업무에 대한 성취감 등 자신의 경력을 가장 중요하다고 꼽았다. 가정과 자녀를 꼽은 이들은 36.7%였다. 사회적으로 성공한 여성 임원들은 처음부터 지금과 같은 여성 임원을 목표로 했을까. 처음부터 꿈꿨다(14.3%)는 응답보다 직장에서 인정받으며 꿈꾸기 시작했다(44.9%)는 응답이 더 많았다. 임원이 되는 게 불가능하다고 생각했다는 응답 또한 12.2%로 낮지 않은 비중을 보였다. 여성 임원으로서 업무를 수행하는데 겪는 어려움으로는 사내 정치를 꼽은 이들이 42.9%로 가장 많았다. 가정생활과의 양립(36.7%)을 꼽은 이들보다 많았다. 설금희 WIN 사무총장은 “남성들은 업무에 상관없이 수시로 비공식적인 자리를 갖고 중요한 정보 교류를 할 때가 많다”고 설명했다. 그런 면에서 여성 임원들은 정보 확보에 제약이 있을 수밖에 없다. 여성 임원들이 사내 정치를 어렵다고 느끼는 이유다.
조금 더 구체적으로 여성 임원들이 상사와의 관계에서 어렵다고 느끼는 점을 물었다. 업무상 소통 방식이 다를 때(32.7%), 의견 충돌이 있을 때 갈등 관리(20.4%), 친목 도모가 어려울 때(14.3%)로 나타났다. 정서적 공감대 형성이 어려울 때도 12.2%에 달했다. 여자의 성공, 가족이 가장 든든한 힘
성공한 여성 임원들은 일과 가정을 어떻게 조화시켜 나가고 있을까. 이들이 일과 가정생활을 양립하는 데 가장 어려운 점으로 꼽은 것은 다름 아닌 자녀 육아(71.4%)였다. 집안 살림에 대한 부담은 14.3%, 일에 대한 가족들의 이해 부족은 12.2%로 나타났다.
‘육아 문제를 어떻게 해결하고 있는가’라는 질문에 시부모나 친부모 등 가족의 도움을 받는다는 응답이 53.1%로 가장 많았다. 베이비시터를 고용한다는 응답은 22.4%, 어린이집 등 육아 시설을 활용한다는 대답은 12.2%였다. 남편 등 가족들과 갈등을 빚는 이유로는 ‘바쁜 업무로 가족들과 보내는 시간이 부족해서’라는 응답이 57.1%였다. 육아 문제로 인한 갈등은 22.4%였다. 이토록 수많은 난관에도 불구하고 이들이 가정과 일을 모두 포기하지 않을 수 있었던 원동력은 무엇일까. 이 역시 ‘가족’을 꼽은 이들이 가장 많았다. 능력 있는 엄마·아내로서 가족들의 인정이 가장 큰 힘이 됐다는 응답이 44.9%였다. 뒤를 이어 자아 성취 32.7%, 사회적 지위 상승 16.3%, 경제적 보상이 10.2%였다.
‘여유 시간은 어떻게 보내는가’라는 질문에는 30.6%가 외식 등 가족들과 시간을 보낸다고 답했다. 운동 등 자기 계발에 쓴다는 응답이 28.6%, 집안 살림 등 가정생활은 18.4%였다.
가정과 일을 동시에 챙겨야 하는 부담은 여성 임원들이 적을 수밖에 없는 현실과도 맞닿아 있다. 구체적으로 여성 임원이 적은 이유를 묻는 질문에 출산·육아 등에 따른 경력 단절을 꼽은 응답은 38.8%였다.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도 32.7%로 적지 않았다. 성공에 대한 간절함이나 열정 부족 24.5%, 유리 천장 등 승진 차별이 14.3%였다.
여성 임원으로서 강점을 묻는 질문에는 28.6%가 추진력과 리더십을 꼽았다. 조직원들과의 소통 능력 26.5%, 업무에 대한 신뢰감이 26.5%로 뒤를 이었다.
여성 임원으로서 더 성공하기 위해 보완해야 할 점으로는 업무 외 인맥 관리가 36.7%였다. 추진력과 리더십이 32.7%, 남성 중심의 조직 문화에 대한 적응력이 16.3%였다. ‘여성이기 때문에 남성 임원들보다 더 많은 노력이 필요한가’라는 질문에는 57.1%가 그렇다고 답했다. 36.7%는 성별에 상관없다고 응답했다.
‘여성 임원 할당제가 더 많은 여성 임원을 배출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인가’라는 질문에는 ‘약간은 도움이 된다’가 46.9%, ‘매우 필요하다’가 34.7%로 대체로 긍정적인 인식이 우세했다. 여성 임원 할당제 도입이 필요한 이유로는 유연한 조직 문화 실현이 44.9%, 여성 직장인들에게 동기부여 36.7%, 남녀평등 사회 구현’이 8.2%였다.
인터뷰 | 여성 임원 모임 WIN 이끄는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사장
“절대 포기하지 마세요. 당신이 리더입니다”
‘여성(女性) 시대’를 넘어 ‘여성(女成) 시대’가 도래한 지 오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국내 기업에서 여성 임원을 만나기가 쉽지 않은 게 현실이다. 2007년 설립된 WIN은 ‘여성 리더를 키우는 여성 리더의 모임’을 지향한다. WIN의 회장을 맡고 있는 손병옥 푸르덴셜생명 사장으로부터 국내에 더 많은 여성 리더가 탄생하기 위한 조언을 들어봤다.
WIN의 역할과 비전은.
“여성 인력들이 국내 기업에서 대단한 활약을 펼치고 있지만 아직까지는 보이지 않는 차별과 환경적 제약이 존재한다. WIN은 여성 전문 인력을 양성해 차세대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지원하고 있다.”
여성 임원들이 특히 갖추기 어려워하는 역량은.
“전략적 사고, 의사 결정, 비즈니스에 영향을 줄 수 있는 경영 마인드다. WIN에서는 이를 위해 토요 스터디 모임의 주제로 다루고 있다. 앞으로는 조찬 강연 등을 통해 더욱 확대해 나갈 계획이다.”
운영 중인 다른 프로그램은.
“‘차세대 여성 리더 콘퍼런스’가 대표적이다. 중간 관리자 여성들이 차세대 리더로 성장할 수 있도록 돕는 것이 이 행사의 목적이다. 여성 중간 관리자들은 이곳에서 여성 임원들을 만나 멘토·멘티 관계를 이어 나가며 실질적인 도움을 주고받는다.”
기업·사회 차원에서 필요한 일은.
“중요한 것은 공정한 평가와 보상이다. 여성들이 육아휴직을 다녀오더라도 공정하게 평가 받을 수 있다면 역량을 백분 발휘해 성과를 낼 것이다.”
여성 직원들 스스로 바꿔야 할 점은.
“업무 전문성을 회사 경영과 접목해 ‘비즈니스 성과’로 입증해 낼 수 있어야 한다. 또 하나 ‘절대, 절대 포기하지 말라’는 것이다. 어떻게 해야 육아와 일을 조화롭게 해결할 수 있을지 방법을 찾아나가는 열정이 중요하다.”이정흔 기자 vivajh@hankyung.com
<본 기사는 한국경제매거진 한경BUSINESS 10006호 제공 기사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