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중국 리더십 2. 영구평화를 위하여…
입력
수정
지면A38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시진핑은 지난 주말 보아오 포럼에서 “2020년까지 아시아경제공동체를 만들자”는 다소는 의심스런 제안을 내놨다. 아시아 공동체의 길을 가자고 제안할 때는 꽤나 고무된 표정이었다. 100년 만에 주체와 객체를 바꾼 ‘부드러운 대동아공영권’이라는 생각도 해보게 된다.
‘공동체’라는 단어는 어감이 좋다. 그러나 ‘아시아적 가치’라고 말하는 순간 군색한 느낌을 주는 것도 사실이다. 보편적 가치가 배제되는 것처럼 들린다. 아시아적 가치라는 것이 있는지도 의문이다. 아시아적 가치는 권위주의이거나 반민주성, 보수성, 전근대성의 토대 위에서만 작동한다. 유교가 바로 그렇다. 아시아적 가치가 국가 비즈니스가 되면 군국주의 일본이 그랬던 것처럼 패권주의를 은폐하는 도구가 될 가능성이 크다.시진핑은 AIIB의 성공에서 적지 않은 힘을 받은 것이 분명하다. 내친김에 아시아공동체론에까지 나아간 것이다. AIIB는 한국을 포함해 이미 40개국에서 창설 멤버가 되기로 약속했다. 중국은 그렇게 대국굴기를 만들어 낸다. 덩샤오핑의 유훈은 “앞으로 30년 동안은 절대로 미국과 일본이 하는 일에 딴죽을 걸지 말라”는 것이었다. 1997년으로부터 아직 20년이 채 되지 않았다. 덩샤오핑의 유훈까지 들먹이며 중국의 조급성을 지적하기에는 좀스럽다. 그러나 대국에 대한 성급함을 중국은 도저히 숨길 수 없다.
우리가 아시아적 공동체 주장에 당혹감을 느끼는 것은 중국의 사회 체제가 갖는 후진성 때문이다. 개방이 두려워 폐쇄적이며, 법치가 없어 자의적이고, 헌법적 가치는 세워진 적이 없고, 언제라도 자의적 권력이 명시적 규칙을 짓밟아 버릴 수도 있을 것 같은 원초적 패권국가라는 인상 말이다. 그러나 변화에 대한 일말의 희망을 갖는 것도 사실이다. 행동거지가 달라질 것이라는 기대다. 중국은 AIIB를 만드는 과정에서 내심 ‘개방과 호혜’라는 교훈을 맵게 배우고 있을 것이다.정치는 제로섬의 세계다. 그러나 시장은 상호거래로 평화를 키워간다. 토머스 프리드먼은 맥도날드가 들어간 국가들 간에 전쟁이 난 적은 없다고 썼다. 러시아가 우크라이나 변방을 침공하면서 색이 바래긴 했지만 이는 진실이다. 여기서 칸트의 명언 하나를 기억해 본다.
“무릇 국가들은 국제법의 기속에도 불구하고 온갖 간계와 강압적인 방법으로 기꺼이 다른 민족을 통합시키고자 한다. 그러나 자연은 국가들을 자연스레 분리해 놓고 있다. 자연은 바로 그런 방식으로 이번에는 세계 공민법만으로는 폭력과 전쟁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할 수 없는 많은 나라들을 상호이해에 따라 스스로 연합하도록 한다. 그것은 상업정신이라는 것이다. 상업정신은 전쟁과는 양립할 수 없다. 상업주의는 조만간 모든 국가들에서 우위를 차지하게 될 것이다. 돈의 힘은 국가 권력 아래에 있는 모든 권력 중에서 가장 신뢰할 만한 것이다. 이것으로써 국가들은 굳이 도덕적 강제가 아니더라도 고귀한 평화를 추구하지 않을 수 없도록 되는 것이다. 또 그것의 중재를 통해 평화를 지키게 된다. 국가들은 항구적인 평화동맹을 체결한 것처럼 행동하게 된다. 바로 이런 방식으로 자연은 국가들의 영구평화를 보장하게 된다.”(영구평화론)
좀 긴 인용이었지만 칸트의 이 제안에 따라 국제연맹도 국제연합도 창설되었다. 돈을 저주하도록 강요하는 한국 사회이기에 더욱 이 도덕 철학자의 명제를 생각하게 된다. 전쟁이 아닌 방법으로 평화를 보장하는 방법은 실로 상업주의적 방법밖에 없다. 아니 전쟁 중일 때조차 장사치들은 아군 적군을 가리지 않고 물건을 사고판다. 칸트는 그 말을 하고 있다.지금 중국의 설익은 평화공세가 시작되고 있다. 일부의 걱정처럼 돈질이나 갑질이라고 볼 수도 있다. 그러나 시장의 중재에 의해, 그리고 돈의 힘이 제어하는 방향으로 중국은 서서히 평화로 이끌리게 될 것이다. AIIB도 없는 것보다 있는 것이 중국을 통제하는 데 낫다. 오로지 북한만이 개성공단을 인질화하는 어리석음을 저질렀다. 그 어리석음을 지금은 깨닫고 있을 것인가. 평화는 힘겹게 나아간다. 중국이 빨리 배울수록 아시아는 안전해진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