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산칼럼] 신뢰사회로 가는 지름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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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뢰는 선진국 진입의 기본 조건지난달 외국에 잠시 다녀올 일이 있었는데 인천에서 오전 8시에 출발하는 항공편을 이용하기 위해서는 새벽에 잠에서 깨야 했다. 이른 기상에 익숙지 않은 사람에겐 사뭇 긴장돼 잠을 설칠 일이지만 누구나 그러하듯 알람시계를 켜 놓고 잔 덕에 숙면할 수 있었다. 알람시계를 믿지 못했다면 다음날의 꽉 찬 일정 수행이 힘들지 않았을까.
과학기술 발전이 불신·갈등 줄일것
깨끗한 인터넷문화 조성도 중요해
김도연 < 서울대 초빙교수·공학 >
여행 중에 떠오른 또 하나의 다른 생각도 믿음이었다. 만약 비행기의 안전과 파일럿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항공여행은 꿈도 못 꿀 일이다. 무려 1만m 상공을 비행하며 여유롭게 커피까지 즐길 수 있는 것은 신뢰가 있기 때문이다. 사회의 구성원이나 시스템에 대한 신뢰가 없다면 삶 자체가 불가능한 것이 현대 사회다.소위 ‘30-50 클럽’은 국민소득이 3만달러 이상이며 동시에 인구가 5000만명 이상인 나라가 멤버인데, 여기에는 미국 일본 독일 영국 프랑스 이탈리아 모두 6개국이 속해 있다. 여기에 더해 대한민국도 금년 혹은 내년에 이 클럽에 속하는 일곱 번째 국가가 될 것이 틀림없으니, 우리는 이제 선진국 문턱에 서 있는 셈이다. 그런데 가장 최근인 2005년 이 클럽에 가입한 이탈리아는 지역차가 매우 커서 북부는 평균 소득이 4만달러를 훌쩍 넘지만 남부는 아직 그 절반에도 못 미치는 큰 문제를 지니고 있다.
동일한 체제하에서 같은 제도로 운영되는 하나의 이탈리아임에도 불구하고 지역 간에 이처럼 큰 차이가 있는 중요한 이유는 북쪽이 상호 신뢰에 바탕을 둔 시민사회를 이루고 있는 반면 남쪽은 아직도 가족주의 전통 속에서 사회 구성원 간의 신뢰가 부족하기 때문으로 이해되고 있다. 도로, 철도, 상하수도처럼 신뢰는 대단히 중요한 사회적 인프라이기에 신뢰의 문화를 가꾸지 못하면 경제는 정체되고 더 나아가 민주정치 제도에도 균열이 생긴다는 것은 너무나 잘 알려진 사실이다. 그러면 오늘의 대한민국은 이탈리아의 남쪽과 북쪽 어디에 더 가까울까.
대한민국 발전에 큰 장애물로 작용하고 있는 지역갈등, 노사갈등, 세대갈등 등은 아직도 우리에게 신뢰라는 인프라가 대단히 미흡함을 증명하는 것이다. 어떤 연구에 의하면 이런 사회적 갈등으로 인한 손실비용이 국내총생산의 4분의 1에 육박하는 300조원에 달한다고도 하니, 만약 우리가 서로를 믿고 사는 신뢰사회를 구축했다면 대한민국은 이미 초일류 선진국에 올라섰을 것이다. 같은 의미로 현재와 같은 상호 불신의 문화를 타파하지 못한다면 우리는 영원히 선진국이 되지 못할 것이다.20년 전 간행돼 베스트셀러가 됐던 신뢰(Trust)의 저자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당시의 대한민국을 저신뢰(low trust) 국가로 분류하면서 이를 개선하지 못하면 중진국의 덫을 벗어나기 힘들 것으로 예측했다. 실제로 일본은 1987년 국민소득 2만달러를 넘어선 지 4년 만인 1991년에 3만달러를 달성했지만 우리는 지난 9년간 2만달러대에 머물고 있다. 이처럼 더딘 발전이 안타깝긴 하지만 그래도 이는 역설적으로 우리의 신뢰문화가 조금씩은 개선되고 있음을 증명하는 것이며, 여기에는 기술의 발전도 한몫한 것으로 믿어진다. 가까운 예로 은행이나 병원 창구에서 순서번호표를 내주는 단순한 기계 한 대가, 그리고 자동차 과속을 단속하는 카메라 한 대가 우리 사회의 상호 불신과 갈등을 크게 줄인 것은 틀림없다.
정보기술과 인터넷 발달이 가져오고 있는 개방성의 확대는 신뢰사회의 절대 요건인 결탁과 부정부패가 없는 세상을 만들어 가는 데 결정적인 기여를 하고 있다. 정부와 기업의 주요 정책 및 의사결정 과정을 인터넷에 공개하는 일은 신뢰사회를 이루는 지름길일 것이다. 그러나 불행히도 인터넷에는 익명성에 기댄 ‘악플’의 역작용도 만만치 않은데, 이로 인해 오히려 불신이 더욱 짙어진다면 우리의 미래는 어둡다. ‘악플’은 범죄 행위다. 깨끗하고 투명한 인터넷 문화를 가꿔 신뢰사회를 이룰 수 있도록 우리 모두가 더욱 노력해야 한다.
김도연 < 서울대 초빙교수·공학 dykim@snu.ac.kr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