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맞짱 토론] 문·이과 통합 위해 교과내용 줄여야 하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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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육부는 문·이과 통합 개편을 계기로 초등학교부터 단계별로 6개 필수과목의 학습 내용을 20% 줄이는 계획을 발표했다. 학생들이 참여하는 토론식 수업을 활성화하기 위해서는 학습 내용을 줄여야 한다는 취지다. 학습 내용 축소에 대한 의견은 엇갈린다.교육학자와 학부모들은 이를 반기고 있다. 수학·과학 교과서의 개념을 단순히 외우는 게 아니라 과학적 사고 능력과 이를 활용할 능력을 키워주려면 필요성이 떨어지는 내용을 과감하게 생략해야 한다고 주장한다. 이를 통해 사교육 부담도 줄일 수 있다는 설명이다. 과학계는 학생들의 기초 역량 저하를 우려하며 반발하고 있다. 선진국들이 과학·수학교육을 강화하고 있는 점을 고려하면 한국의 문·이과 통합형 교육과정은 과학·수학교육을 축소 또는 약화시킬 수 있다는 이유에서다.
일본이 학습량을 감축하고 학생 자율을 중시하는 ‘유토리(餘裕) 교육’의 실패를 반성하고 다시 교육을 강화하고 있는데 한국은 실패한 제도를 뒤쫓고 있다는 지적도 있다. ‘문·이과 통합교육 위해 학습 내용 줄여야 하나’라는 주제로 이덕환 서강대 화학·과학커뮤니케이션학과 교수와 이상욱 한양대 철학과 교수가 지상 토론을 벌였다.
찬성 / “과학 소양 갖출 정도면 충분…공학 지원자만 심화학습 하면 돼”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내용 정리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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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자는 과학이 객관적 진리를 차근차근 배워야 하는 학문이기에 중·고등학교에서 배우는 기초적 내용이 그대로인 것은 당연하다고 주장한다. 여기에 더해 ‘입에 쓰더라도 좋은 약은 억지로라도 먹여야 한다’는 격언을 따라, 한국의 미래를 짊어질 과학자를 육성하기 위해 중등교육과정에서 기초를 튼튼하게 골고루 가르쳐야 대학에서 고급 내용을 배울 수 있다고 주장하기도 한다. 연구 선진국을 추격하는 개발도상국, 예를 들어 중국은 매우 높은 수준의 수학·과학 교육을 시행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하지만 이런 주장은 잘 따져보면 허점이 많다. 우선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는 학생의 절반 이상이 대학에서 ‘고급 과학’을 배우지 않는다. 고등학교에서 과학을 배우는 학생들 전부가 예비과학기술자라는 전제 하에 과학 교육을 하는 것은 바람직하지 않다. 그보다는 모든 고등학생이 공통으로 배우는 과학은 핵심 개념과 원리를 중심으로 가르치고 미래 과학기술자가 될 학생들은 여기에 더해 심화 교육을 따로 받게 하는 것이 옳다. 게다가 대학에서 이공계열 학과로 진학하는 학생들도 모두 직업 과학자가 되지는 않는다. 그들에게 필요한 것은 과학적 사고능력과 새로운 과학지식을 빨리 습득해 활용할 수 있는 학습능력 및 응용능력이다.
기존 과학 교육에 담긴 많은 내용 중 쓸모없는 것은 없을 것이다. 하지만 그 모든 내용이 21세기 한국 사회를 살아갈, 과학적 소양을 갖춘 시민이 갖춰야 할 좋은 약인지에 대해서는 회의적이다. 적어도 교육부가 추진하는 통합과학의 교과내용은 현대 과학이 제공하는 설명의 폭과 깊이를 보여줄 수 있는 방식으로 구성돼야 하고, 기존 교과내용에서 이런 측면에서 필요성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는 내용은 과감하게 생략해야 한다.
현재 우리의 과학기술은 추격형 단계를 지나 세계 연구를 선도하는 단계로 나아가려 하고 있다. 선진국의 과학 교육이 다양한 분야의 학제적 성격을 강조하고 풍부한 성찰 거리를 제공한다는 점을 볼 때, 우리도 이런 방향으로 나아가는 것이 한국 과학기술 연구의 미래를 위해서도 바람직한 선택이 될 것이다.
반대 / “고교교육, 과거 중학교 수준 축소…학습량 줄면 기초학력 떨어져”
융합시대에 맞는 교육 방법 새롭게 연구해야
교과내용 감축은 1992년 선택중심 교육과정에서 시작됐다. 46개였던 교과목을 70개로 늘리는 대신 과목별 내용을 35%나 줄여버린 것이다. 1998년에는 창의교육을 핑계로 30%를 축소했고, 2009년에는 창의·인성 교육을 위해 또 20%를 줄였다. 이제 교과목을 100개로 늘리고 초·중·고 교육에서 20%씩 추가로 감축한다. 초·중학교 감축분을 흡수해야 하는 고교는 현재 내용의 60%를 포기해야 한다. 수학과 과학이 직격탄을 맞는다. 고교 교육이 과거 중학교 수준에도 미치지 못하게 되는 것이다.
학생들의 부담은 교과서 분량이 아니라 대학입시에 의해 결정된다. 설사 학교에서 아무 것도 가르치지 않더라도 입시를 눈앞에 둔 학생은 밤잠을 설치면서 사교육을 찾을 수밖에 없다. 불합리한 입시 경쟁을 해결하지 못하는 교육내용 감축은 학력만 떨어뜨릴 뿐이다.
교과내용이 줄어들면 대학수학능력시험 출제 범위도 자동으로 줄어들고, 변별력이 필요한 수능은 더 뒤틀린 문제로 채워진다. 결국 지식을 가르치는 공교육은 힘을 잃어버리고, 뒤틀린 객관식 문제의 답을 ‘찍는’ 기술을 훈련하는 무의미한 사교육이 힘을 얻는다.
수능 출제 오류의 가능성도 그만큼 커진다. 학생들의 부담이 오히려 더 늘어나는 것이다. 지난 20여년 동안 반복적으로 경험한 일이고, 교육 예산의 40%에 이르는 사교육비에 우리 모두의 등골이 휘고 있는 것이 그 결과다.
이제는 세상이 달라졌다. 문·이과 구분 교육에서 배운 알량한 씨름 기술로 무장한 반쪽짜리 기능인력으로는 더 이상의 국가 발전을 기대할 수 없다. 학생들도 달라졌다. ‘수포자’는 수학을 포기하는 학생이 아니라 오로지 수학자 양성만을 추구하는 엉터리 수학교육에 적응하지 못한 학생이다. 이제는 기능 교육이 아니라 학생들이 현대 문명의 의미와 가치를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는 교육이 필요하다. 꿈과 끼를 들먹이는 교육부의 공허한 말잔치는 무의미한 것이다.국어를 화법, 문법, 문학으로 쪼개놓은 엉터리 선택중심 교육부터 바로잡아야 한다. 사회와 윤리도 마찬가지다. 물리, 화학, 생명과학, 지구과학을 구분하는 철옹성도 허물어야 한다. 개념 중심의 잘못된 과학교육을 바꾸고 ‘통합’의 허울 속에 숨은 교과이기주의도 청산해야 한다. 퇴출 위기에 놓인 과학 분야 ‘융합과학’ 교과서가 바로 그런 노력의 결과였다. 융합시대가 요구하는 전인교양교육을 통해 학생이 자신의 꿈과 끼를 찾고, 미래 행복을 추구하도록 해주는 것이 문·이과 구분 폐지의 목표가 돼야 한다. 무리한 교육내용 감축이 아니라 교육의 내용과 방법을 완전히 바꾸기 위한 심각한 고민과 노력을 시작해야 한다.
김태훈 기자 taehu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