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감처럼 번지는 '로스코 신드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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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현장 생생 리포트지난 17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한가람미술관 한쪽에 마련된 ‘로스코 채플’. 경건한 음악과 함께 미국 추상표현주의 거장 마크 로스코(1903~1970)의 그림을 감상할 수 있는 33㎡ 남짓한 공간이다. 반주가 없는 그레고리안 성가가 흘러나오는 가운데 관람객 20여명이 방석을 깔고 바닥에 앉아 벽에 걸린 그림을 바라보며 명상에 빠져들었다. 한 20대 여성은 살짝 눈물을 훔치기도 했다. 미술해설사(도슨트) 김찬용 씨는 “이 공간이 좋아 전시회를 다섯 번이나 방문한 50대 여성도 있다”고 귀띔했다.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예술가' 마케팅 적중
예술의전당 전시 56일 만에 관람객 12만명
연극 '레드' 연일 매진 행렬…관련 책도 인기
◆전시·연극 ‘북적’한국 문화예술계에 로스코 바람이 거세다. 지난 3월23일 시작한 예술의전당 ‘마크 로스코 전’을 찾은 관람객은 전시 56일째인 지난 17일 12만명을 넘어섰다. 하루 평균 2000여명이 다녀간 셈. 국내에서 인기 있는 인상주의 화가의 작품전이 아닌 전시로는 보기 드문 흥행이다. 로스코의 예술 세계를 그린 연극 ‘레드’도 연일 매진 행렬을 이어가고 있다. 지난 3일 서울 흥인동 충무아트홀 중극장(270석)에서 개막한 ‘레드’는 2주 만에 4630명의 관객을 동원했다.
철학자 강신주 씨가 해설을 쓴 도록(圖錄) 세트 마크 로스코 WORKS/TEXT(민음사)는 전시회와 연극에 관람객이 몰린 이달 들어 판매량이 이전보다 세 배가량 늘었다. 프랑스 문화역사가 아니 코엔 솔랄이 지은 마크 로스코(다빈치)도 최근 출간됐다.
로스코는 예술의전당에서 전시회가 열리기 전만 해도 국내에서 ‘아는 사람만 열광하는’ 생소한 작가였다. 로스코는 잭슨 폴락과 함께 ‘입체파(큐비즘)’를 밀어내고 세계 현대미술의 새로운 주도 세력이 된 추상표현주의를 이끈 화가다. 러시아 유대인 부모 밑에서 태어나 뿌리내릴 곳 없이 불안한 삶을 살았던 그는 깊은 사색과 고뇌, 우울의 극한을 캔버스에 표현했고, 작가의 격정적 감정을 색으로 표현하는 추상 세계의 문을 열었다.◆예술 문턱 낮춘 마케팅 주효
이 같은 ‘로스코 붐’의 일등공신으로 ‘예술의 문턱을 낮춘 마케팅’이 꼽힌다. 기획사는 전시 초반 ‘스티브 잡스가 사랑한 작가’라며 대대적인 ‘잡스 마케팅’을 펼쳤다. 죽기 직전 로스코에 매료된 잡스의 이야기를 중점적으로 알리며 일반 관객의 호기심을 자극했다. 또 작품을 설명하는 오디오 가이드에 배우 유지태가 연극 ‘레드’의 대사를 읊어주는 ‘오디오 드라마’를 담았다. 김건희 코바나콘텐츠 대표는 “연극 ‘레드’에는 로스코 예술세계의 핵심이 구어체로 나와 있다”며 “이 대사들을 오디오 가이드에 담아 작품에 쉽게 다가설 수 있도록 했다”고 설명했다.
음악도 중요한 요소다. 음악을 들으며 작업에 몰두했던 로스코의 작업실에 온 듯한 느낌이 들도록 전시실에는 바흐의 무반주 첼로곡 등이 흘러나온다. 주말에는 전시장에서 가장 영적인 공간인 ‘로스코 채플’에서 클래식 음악공연이 열린다. 또 연극에서 로스코가 자살하기 전 마지막으로 그리는 ‘레드’ 등 일부 작품에 사진 촬영을 허용해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에서 입소문이 나게 한 것도 20~30대 관객을 끌어들이는 데 주효했다는 평가다.◆종교적 체험도 한몫
전문가들은 관람객이 열광하는 본질적인 이유로 그림이 주는 ‘종교적 체험’을 들고 있다.
전시회를 두 번째로 찾은 조유진 씨(27)는 “처음 그림 앞에 섰을 땐 나도 모르게 왈칵 눈물이 났다”며 “치유를 받는 느낌이었다”고 말했다. 김찬용 씨는 “로스코는 실제로 자신의 그림을 통해 관람객이 각자의 근원적 감정을 만날 수 있다고 믿었다”며 “형체가 불분명한 그림이다 보니 작품 앞에 서 있는 사람마다 각자의 시선으로 자신을 돌아보고, 사색하게 한다”고 설명했다.전시 기획사가 이런 종교적 체험을 극대화하기 위해 미국 텍사스 휴스턴에 있는 ‘로스코 채플’을 본뜬 명상의 공간을 따로 만들어 놓은 이유다. 강신주 씨는 “색채의 관계 또는 색채들이 펼치는 드라마를 통해 화가의 감정과 관람객의 감정은 서로 소통할 수 있다”며 “이게 바로 로스코의 그림이 지닌 힘”이라고 설명했다.
고재연/선한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