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켓인사이트] 리베이트용 상품권 제약사에 '세금폭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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用處, 못밝히고 안밝히고▶마켓인사이트 5월19일 오후 4시43분
"영업비 명세 없어 소명 곤란"
'리베이트' 경우 실토 어려워
대표이사에도 '불똥'
상여금 간주해 거액 소득세
국세청 "他업계로 조사 확대"
‘상품권발(發) 세금폭탄’이 제약업계를 강타하고 있다. 국세청이 병원과 의사에 대한 리베이트 제공 용도로 의심되는 제약사들의 상품권 매입에 대해 회사별로 수십~수백억원의 법인세를 추징했기 때문이다.
법인 돈으로 사들이는 상품권은 사용처를 공개하면 비용으로 처리돼 과세소득에서 제외되지만 음성적으로 주고받는 리베이트의 성격상 많은 제약사가 사용처를 밝히는 것을 꺼리고 있다.
19일 제약업계에 따르면 A사는 2009~2013년 사들인 상품권의 사용처가 불분명하다는 이유로 지난 2월 서울지방국세청으로부터 143억원의 법인세를 부과받은 것으로 확인됐다.B사도 지난 6일 대전지방국세청으로부터 71억원, C사는 지난 1월 서울지방국세청으로부터 57억원의 법인세를 추징당했다. 법인세율 10~22%를 고려하면 A사는 해당 기간에 최대 600억원어치의 상품권을 샀다는 얘기다.
결국 탈 난 '상품권 접대'…年 영업이익의 4배 세금 추징받은 곳도
국세청은 앞서 지난해 11월 제약사 100여곳에 법인 신용카드로 구매한 상품권의 사용처 소명을 요구하는 공문을 보냈다. 최근 5년 동안 매입한 상품권을 누구에게 얼마나 줬는지 명단을 제출하라는 내용이었다.상품권 사용내역을 밝히면 연간 접대비 한도(기본금액 1200만~1800만원) 내에서 세금 추징을 피할 수 있다.
국세청이 이처럼 제약업계를 압박하고 나선 것은 세수 확보를 위한 측면도 있지만 보다 근본적으로는 의약계에 광범위하게 퍼진 리베이트 수수 관행을 근절하겠다는 정부의 의지에 따른 것이다. 대형 제약사들의 경우 추징금이 수백억원에 달할 수도 있다는 관측이다.
세금을 추징당한 제약사들은 자금 운용에 적잖은 부담을 안게 됐다. B사가 부과받은 추징금은 지난해 영업이익(17억원)의 4배가 넘고 지난해 말 기준 현금 및 현금성자산(37억원)의 2배 수준에 육박한다. B사는 11억여원 규모의 자사주를 매각하는 한편 모자라는 돈은 금융권에서 차입할 계획이다. A사와 C사의 추징금도 지난해 영업이익의 절반을 넘는 규모다.국세청은 또 제약사가 상품권 사용내역을 밝히지 않을 경우 법인세 추징과 별도로 해당 기업의 대표이사에게 최고 38%의 소득세도 부과하고 있다. 세법상 해당 상품권이 대표이사 상여금으로 지급된 것으로 간주하기 때문이다.
이 경우 소득세 원천징수의무자인 기업이 대신 세금을 내주고 나중에 대표이사에게 구상권을 청구하는 방식으로 세금 처리를 한다. 만약 대표이사가 돈을 낼 형편이 못 되면 회사가 떠안을 수밖에 없다. 이정섭세무회계사무소의 이정섭 대표세무사는 “현실적으로 대표이사에게 모든 부담을 지울 수 없기 때문에 기업들이 구상권을 포기하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문제는 제약사들이 리베이트 제공 사실을 부인하면서도 상품권 용처를 밝히지 못한다는 데 있다. 현행 의료법은 리베이트 수수가 적발될 경우 준 측과 받은 측 모두를 처벌하도록 돼 있다.
제약사의 한 관계자는 “50만원 이상 접대비에 대한 지출증빙이 2009년 폐지되면서 이후 우리를 포함한 대다수 제약사가 영업비용의 지출명세서를 작성하지 않거나 일부만 작성해왔다”며 “거래처 부도 및 폐업, 영업사원 퇴사 등까지 겹쳐 상품권 용처를 소명하기가 현실적으로 어렵다”고 해명했다.
이 같은 기록 소실 문제가 아니더라도 현실적으로 ‘을(乙)’인 제약사가 세금을 피하기 위해 ‘갑(甲)’인 병원이나 의사들에게 제공한 상품권 내역을 실토하기가 쉽지 않다는 지적이다.
세금을 부과받은 제약사들은 일단 법적 절차에 나설 채비를 하고 있다. 관련 제약사들은 조세 불복 절차를 밟기 위해 법률자문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허태현회계사무소의 허태현 대표세무사는 “외국계 제약사들이 해외에서 학회를 개최해 의사들의 출장경비를 대납하는 방식으로 편의를 제공하는 현실에서 국내 제약사들의 상품권 리베이트만 문제삼는 것은 역차별이 될 수 있다”고 말했다.
하지만 국세청은 제약업계뿐만 아니라 향후 일반 기업으로도 상품권 조사를 확대할 방침이어서 경제계 전반에 적잖은 파장이 예상된다.
■ 대표이사 상여처분회사 법인카드 등으로 쓴 비용의 사용처가 불분명할 경우 이 돈이 회사 대표에 흘러갔다고 보고 대표이사에게 소득세를 물리는 처분. 국세청은 제약사가 산 상품권의 사용처가 불분명하면 대표이사 상여처분을 내릴 계획이라고 지난해 11월 밝혔다.
임도원/김우섭 기자 van7691@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