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대 앞서는 취업률…졸업 때 웃는 한국외대 특수어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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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업의 신흥국 진출 붐 타고 '인구론' 돌파…몽골·우크라어 인기섬유업체 약진통상에 근무하는 김리환 씨(30)가 2004년 입학할 때만 해도 베트남어과는 한국외국어대에서 인기 학과가 아니었다. 김씨는 당시 잘나가던 중국어과에 가고 싶었지만 치열한 경쟁을 피해 선택한 게 베트남어과였다. 이것이 취업의 지름길이 될 것이라고는 생각지도 못했다.
베트남어과 취업률 94% 달해…말레이·인니, 인도어과도 71%
CJ제일제당·한세실업 등 채용설명회 통해 '입도선매'
미국과 화해…이란어과 취업률↑
볼보·이케아 등 한국 진출로 스칸디나비아어도 인기
권오갑·안민수·정문국 등 특수어과 출신 대표적 CEO
졸업도 하기 전에 기업들의 ‘러브콜’이 이어져 LG그룹 서브원 입사가 결정됐다. 그는 지난해 2월 약진통상으로 옮겨 베트남 호찌민에서 일하고 있다. 김씨는 “취업난이 심각하지만 학과 동기와 선후배 중에는 취업에 실패한 사례가 거의 없다”고 말했다. 지난해 베트남어과의 취업률은 93.8%였다.
기업의 제3세계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희소성 있는 한국외대 특수어과들이 돌풍을 일으키고 있다. 특수어과 학생들이 차별화된 언어로 무장, ‘인구론’(인문계 학생의 90%는 논다)을 돌파하고 있다.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와 인도어과의 지난해 취업률은 71.4%였다. 이란어과(69.2%)와 이탈리아어과(68.8%)가 뒤를 이었다. 이들의 취업률은 전국 4년제 공학계열 취업률(평균 65.6%)을 뛰어넘는다.2009년 신설된 몽골어과와 우크라이나어과는 졸업생 대부분이 취업문을 뚫는 등 승승장구하고 있다. 노어과(65%) 포르투갈어과(63.6%) 태국어과(61.9%) 아랍어과(57.5%) 루마니아어과(57.1%) 등의 취업률도 문과 중에선 높은 편이다.
지난해 베트남어과 졸업생 17명 중 15명이 취업에 성공했다. 롯데백화점 3명과 현대홈쇼핑 2명을 비롯해 롯데카드와 KT&G 등 베트남 현지 진출을 적극적으로 추진하고 있는 유통업체들이 많았다. 졸업생 28명 중 20명이 일자리를 잡은 말레이·인도네시아어과(마인어과) 졸업생 상당수도 롯데백화점(4명)과 CJ푸드빌 등 유통업체에 취업했다. 섬유회사인 한세실업에도 두 학과 졸업생이 두 명씩 들어갔으며 삼성물산, 하나투어 등에도 입사했다.
송정남 베트남어과 학과장은 “한국 유통기업들이 중국 다음 진출지로 베트남을 선택하면서 관련 취업자가 많았다”고 말했다. 서명교 마인어과 학과장은 “동남아시아가 새로운 시장으로 부상하면서 학과 취업률이 오르고 있다”며 “최근 정치적 안정을 되찾은 인도네시아의 국내 환경도 작용했다”고 설명했다. 한 대학 관계자는 “10년 전만 해도 이름부터 생소하다며 상대적으로 소외됐던 학과들이 인기학과로 탈바꿈했다”고 귀띔했다.중국에 이어 ‘세계의 공장’으로 떠오르고 있는 인도에는 제조업 관련 취업자가 많았다. 인도어과는 2012년 이후 3년간 70% 이상의 취업률을 기록했다. 지난해 졸업생 30명 중 20명이 LG전자, 두산중공업, KCC 등에 취업했다.
이란어과는 이란과 미국의 화해무드에 따라 2012년 35.7%인 취업률이 지난해 69.2%로 급상승했다. 졸업자 26명 가운데 18명이 금호아시아나, 우리은행, 신한다이아몬드공업 등 다양한 업종으로 진출했다. 유달승 이란어과 학과장은 “서방의 경제제재를 받던 이란이 국제사회와 핵 협상에 나서면서 중동에서 활로를 찾는 한국 기업의 수요가 늘고 있는 것”이라고 분석했다.
우크라이나어과는 지금까지 졸업한 학생 13명이 전원 취업에 성공했다. 홍석우 우크라이나어과 학과장은 “우크라이나가 서방 기업에 문호를 개방하면서 한국 기업의 진출이 활발해지고 있다”고 전했다. 몽골어과는 2013년 배출한 첫 번째 졸업생 4명 중 3명이 취업에 성공했고, 지난해에는 졸업생 3명 중 2명이 건설업체 한라 등에 취업했다.특수어과 출신 중에 성공한 인사도 많다. 권오갑 현대중공업 사장은 포르투갈어과 71학번이고 안민수 삼성화재 사장은 같은 과 76학번이다. 김승동 LS네트웍스 사장은 노어과 73학번이고, 한철호 (주)밀레 대표는 마인어과 78학번이다. 윤강로 KR선물 회장은 인도어과 77학번, 서정 CJ CGV 사장은 스칸디나비아어과 80학번이다. 김병효 우리PE(사모펀드) 사장과 이장석 한국IBM 부사장은 각각 베트남어과 75학번과 79학번이다. 김경석 주바티칸대사관 대사는 이탈리아어과 68학번, 정문국 ING생명 사장은 네덜란드어과 78학번이다. 유의동 새누리당 국회의원은 태국어과 90학번이다.
이처럼 특수어 전공자들의 몸값이 오르면서 기업들은 ‘입도선매’에 나서고 있다. CJ와 한세실업은 2010년대 들어 베트남어과에서 매년 채용설명회를 열고 있다. 마인어과 학생들을 대상으로는 롯데백화점 등 롯데그룹 계열사에 이어 올해부터 CJ제일제당이 채용설명회를 시작했다. 포스코가 운영하는 ‘포스코스칼라십’ 제도에 선정되는 베트남어과와 마인어과, 인도어과 학생도 늘어나는 추세다. 재학 중 현지 어학실습 기회를 제공하고 졸업하면 포스코 취업을 보장하는 프로그램이다.
이들 학과에 비해 취업률이 다소 떨어지지만 앞으로 인력 수요가 늘 것으로 예상되는 학과들도 있다. 특수어과로는 스칸디나비아어과(지난해 취업률 54.5%), 터키·아제르바이잔어과(52%) 등이 꼽혔다. 박현숙 스칸디나비아어과 학과장은 “H&M, 이케아, 볼보 등 스웨덴 기업의 국내 시장 진출이 향후 활발히 이뤄질 것으로 보여 취업 전망이 밝다”고 말했다. 김대성 터키·아제르바이잔어과 학과장은 “터키는 현대차와 효성 등 대기업들이 큰 관심을 보이고 있다”며 “현지 진출 기업들의 인재 추천 요구가 이어지고 있어 취업이 어렵지 않을 것”이라고 전망했다.지난해 66.7%의 취업률을 기록한 스페인어과는 기업들의 중남미 진출이 활발해지면서 수요가 더 늘 것으로 예상된다.
박상용 기자 yourpenci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