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데스크] 선진화법에 안주하는 여야

손성태 정치부 차장 mrhand@hankyung.com
3선을 지낸 새정치민주연합의 K의원은 17, 18대 국회를 ‘야만의 시대’라고 불렀다. 본회의를 앞두면 직권상정을 막기 위해 쇠사슬과 해머 등을 챙겼고, 동료 의원들과 모여 국회의장석을 점거할 수 있는 ‘스크럼 대오’를 짜곤 했다.

초·재선 의원은 ‘열외’가 없었다. 여성 의원까지 차출됐다. 육박전을 방불케 하는 본회의를 치르고 나면 대부분 의원들은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전치 몇 주는 기본이고 1개월 이상 진료 기록은 의정 활동을 빛내는 ‘훈장’처럼 여겨지기도 했다.19대 들어 ‘국회선진화법’으로 불리는 국회법 개정안이 도입되면서 ‘폭력이 난무했던 국회’는 사라졌다. 선진화법은 다수당이 일방적으로 법안이나 안건을 처리하는 것을 막기 위해 국회의장의 직권상정 요건을 천재지변, 전시 등으로 엄격하게 제한하고 있다. ‘비폭력 국회’에서 명분을 찾았다.

선진화법, 정치불신 키워

하지만 지난 3년여간 선진화법은 국민의 정치 불신과 혐오를 키웠을 뿐이라는 부정적 평가를 받고 있다. 지난 5월 임시국회 마지막 본회의에서 공무원연금 개정안과 함께 국회법 개정안이 통과된 것을 놓고 입법부와 행정부가 충돌하고 있다. 위헌이라는 지적을 받고 있는 국회법 개정안이 최소한의 숙려기간도 없이 처리된 것은 국회선진화법 때문이었다. 야당의 요구를 받아들이지 않고서는 공무원연금 개정안을 국회에서 통과시킬 수 없었기 때문이다. 유승민 새누리당 원내대표가 청와대와 당내 반대 기류에 애써 눈을 감은 이유이기도 하다.새누리당은 요즘 선진화법부터 뜯어고치겠다고 공세를 펴고 있다. 하지만 새누리당이 독자적으로 법을 바꿀 수 있는지는 회의적이다. 2014년 5월께 새누리당이 국회법 정상화 태스크포스(TF)팀을 꾸렸지만 눈에 띄는 진척사항은 없다. 올초 선진화법의 위헌 여부에 대한 권한쟁의 심판 청구서를 헌법재판소에 제출한 게 TF팀이 1년여 동안 한 일의 전부다.

새정치연합의 한 중진의원은 “야당의 협상력을 높여줬지만 ‘빈손 국회’의 모든 책임을 안긴다는 점에서 선진화법은 야당에 ‘양날의 칼’과 같다”며 “현 정부 들어 잘한 것도 없는데 선거를 계속 이기는 것을 보면 국회선진화법이 여당에도 나쁠 게 없는 법”이라고 말했다. “선진화법으로 인한 입법권 우위 시대를 여당도 함께 누리면 ‘남는 장사’가 아니냐”고도 했다.

신속처리제도 등 대안 찾아야2014년 초 여야는 선진화법에 새해 예산안을 무조건 기한 내 처리하도록 하는 예산안 자동부의안을 끼워 넣었다. 역설적이게도 정부 여당의 가장 큰 골칫거리를 한 방에 해결해준 것도 선진화법이다.

19대 국회는 시급한 경제 관련 법안들을 제때 처리하지 못하고, 전혀 관련이 없는 법안들을 여야가 주고받기 식으로 협상하는 후진적인 협상 정치의 전형을 보여줬다는 비판을 받고 있다. 국회선진화법의 실험은 실패로 끝났다는 게 여론의 냉정한 평가다.

국회선진화법의 개정에 앞서 ‘식물국회’라도 면할 수 있는 대안을 마련하는 것은 채 1년도 남지 않은 이번 국회의 과제다. 이견이 없는 법안은 상임위원회의 숙려기간을 거쳐 법제사법위원회 첫 회의에 무조건 상정하는 ‘신속처리제도’ 등이 현실적인 대안으로 꼽힌다. 이번 연금 협상에서 가장 큰 폐해로 지적됐듯이 쟁점 법안에 상관이 없는 법안들을 엮는 협상 관행을 없애자는 대승적 차원의 여야 합의도 기대해본다.

손성태 정치부 차장 mrhan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