달밤 궁궐에서 역사를 보다…사석원 개인전

선명한 색채의 향연이다. 푸른색 초록색 자주색 깃털을 한 부엉이가 샛노란 달빛 아래서 날갯짓을 한다. 수십 개의 물감 덩이를 등에 올린 채 내달리는 꽃사슴도 있다. 두툼하게 칠해진 원색 물감은 고궁 뜰에 흐드러지게 핀 매화 꽃잎이 되고, 궁궐 뒤편에 위엄있게 선 호랑이의 털 뭉치가 된다. 서울 평창동 가나아트센터에서 열리고 있는 사석원의 개인전 ‘고궁보월(古宮步月)-옛 궁에서 달의 그림자를 밟노라’이다.
작가에게 궁궐은 친숙함과 생경함이 공존하는 곳이다. 서울 토박이인 그는 어린 시절부터 고궁을 종종 찾았다. 달빛을 받은 단청을 볼 때마다 상상 속 풍경이 피어올랐다. 수백 년 전 사람들은 어떤 심정으로 후원을 거닐었을까. 역사책을 뒤져가며 찾은 순간을 상상을 더해 화폭에 담았다.이번 전시에 나온 그림 40여점에는 달이 자주 등장한다. 긴 세월 동안 세상 구석구석을 조용히 지켜본 존재다. 사슴 호랑이 토끼 부엉이 등 각종 야생동물과 함께 환상적인 분위기를 자아낸다. 동물마다 의미를 정해 놓은 것은 아니다. 한 동물이 작품에 따라 궁궐의 주인이나 주변 인물을 상징하기도 하고, 관찰자 역할을 맡기도 한다. 작품의 의미는 암시를 따라 보는 이들이 추리하도록 여지를 남겨뒀다.
궁궐에 얽힌 각기 다른 사연을 보여주기 위해 작품의 소재와 기법을 달리했다. ‘1418년 경복궁 근정전’은 장중한 궁궐과 함께 영민해 보이는 흰 토끼를 커다랗게 그렸다. 제목의 1418년은 조선 시대 세종이 즉위한 해다. 색색의 화려한 화관을 쓴 토끼가 복스럽고 상서로운 느낌을 풍긴다.

고종 시기를 염두에 두고 그렸다는 ‘창덕궁 부용지 설경 연작’은 이와 대비되는 인상을 준다. 원색 물감을 두껍게 쌓아올리는 작가 특유의 기법 대신 동양 수묵화 같은 단조로 궁궐 뜰을 묘사했다. 작가는 “쇠락해가는 왕조의 쓸쓸한 비장미를 표현하려고 했다”며 “국운의 흥망성쇠에 따라 궁의 분위기가 달랐을 것”이라고 설명했다.
대학에서 동양화를 공부한 작가는 전통 민화적 색채를 띤 유화를 선보인다. 작품을 그릴 때에는 캔버스를 눕힌 채 유화물감을 짜 올려 끝이 뾰족한 동양 붓으로 획을 긋는다. 뼈가 있는 듯 기운찬 획을 따라 물감이 굳어 도드라져 입체적인 느낌을 준다. 작가는 “궁궐의 위엄과 장중한 아름다움을 표현하기 위해 이전보다 더 많은 양의 물감을 썼다”며 “색채와 동물 소재를 통해 이제는 과거가 된 파란만장한 이야기들을 보듬고 싶었다”고 말했다. 7월12일까지. (02)720-1020

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