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영춘의 데스크 시각] 국민연금을 위한 변명

하영춘 산업부장 hayoung@hankyung.com
이런 모습을 본 적이 거의 없었던 것 같다. 당황해하는 것 같기도 하고, 허둥대는 것 같기도 하다. 얄미울 정도로 자신있던 평소와는 사뭇 다르다. 다름 아닌 삼성 얘기다. 미국계 헤지펀드인 엘리엇매니지먼트의 공격에 대처하는 모습을 보면 그렇다. “국민연금만 찬성하면 (제일모직과 삼성물산이) 합병할 수 있다(김신 삼성물산 사장)”는 애절한 말도 평소 삼성에서는 잘 듣지 못하는 말이다.

그만큼 엘리엇의 공격은 집요하다. 하긴 채무불이행을 선언한 아르헨티나의 채권을 산 뒤 이자까지 받아내기 위해 군함과 대통령 전용기마저 압류했던 엘리엇이다. 세계에 존재하는 각종 연기금과 펀드 중에서도 가장 공격적이다. ‘천하의 삼성’이 당황해하는 걸 보면 그 공격력을 인정할 수밖에 없다. 쉽게 물러날 것 같으면 애초 덤비지도 않았을 것으로 보는 게 맞다.수비수가 될 수밖에 없는 입장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 성사의 캐스팅보트를 쥔 것으로 주목받는 국민연금은 정반대다. 각종 연기금과 펀드 중에서도 가장 보수적이다. 축구로 치면 전형적인 수비수다. 간혹 골을 넣지만, 그보다는 골을 안 먹는 데 더 치중한다. 대부분 국민의 노후자금을 관리하는 만큼 그럴 수밖에 없다.

이건 명분이다. 이유는 딴 데 있다. 열 골을 넣었다고 해도 한 골을 먹으면 치도곤을 당한다. 10-1로 이기는 것보다 0-0으로 비기는 게 낫다. 감사원의 감사를 제대로 받으려면 그렇다. 연간 수익률을 아무리 많이 내도 칭찬받지 못한다. 오히려 여러 가지 투자 중 한 가지라도 잘못되면 엄한 책임 추궁을 당한다. 그러니 아무리 기대수익률이 높아도 선뜻 움직이지 않는다.의결권 행사 때도 그렇다. 국민연금이 5% 이상 지분을 갖고 있는 상장사는 166곳에 이른다. 시가총액 상위 100대 기업 중 33곳의 지분을 5% 이상 보유하고 있다. 웬만한 금융지주사의 1대주주는 국민연금이다. 관심이 쏠린 삼성물산과 제일모직 지분도 각각 11.21%와 5.04%를 갖고 있다. 그런데도 국민연금은 의결권 행사에 조심스럽다. 자칫하면 ‘연금사회주의’라는 오해를 받을 수 있어서다.

연금기금 전체 수익률 고민해야

예민한 사안에 대해선 더욱 그렇다. 여기저기서 원망을 듣고, 나중에 감사원 등에서 추궁받는 것이 싫다. 그래서 국제 의결권 자문사인 ISS와 한국기업지배구조원 등으로부터 자문을 얻는다. 그것도 모자라 외부 인사로 구성된 의결권 전문위원회라는 걸 만들었다. 여기서 찬반을 결정토록 해 나중에 책임 추궁을 당할 소지를 아예 없애 버렸다. 시장을 보는 시각이나 자금 운용 능력을 따지면 기금운용본부 운용인력들이 최고의 프로들인데도 말이다.이런 국민연금이 고민에 빠졌다. 제일모직과 삼성물산 합병에 대한 입장을 조만간 정해야 해서다. 국익도 생각해야 하고, 주주가치도 생각해야 한다. 삼성물산 대주주이자 제일모직 대주주이고, 웬만한 기업의 대주주인 만큼 시장 전체의 움직임과 그에 따른 국민연금 수익률도 고려해야 한다.

이번에 중요한 것은 책임감이다. 한국을 대표하는 기업에 관한 일이고, 세계적 벌처펀드마저 끼어들었다. 그런 만큼 국민연금을 위해서라도 가장 정확하고 책임 있는 판단을 내려야 한다. 이번 사안에 대해서도 ‘책임회피’를 최우선 잣대로 삼아선 곤란하다. 책임 추궁은 감사원만 하는 것이 아니다.

하영춘 산업부장 hayou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