논문만 쓰는 공대…조선·건설 부실 키웠다

세계적 연구 내놓아도 논문 수 못 채우면 교수 임용 탈락

플랜트 교육 위기, 결국 산업경쟁력 약화로
한국의 미래 먹거리인 플랜트산업이 공과대에서 외면당하고 있다. 해외 플랜트 수주가 급증하면서 설계 등 고급 인력 수요는 크게 늘었지만 공대에서 이를 가르칠 교수는 되레 줄고 있다. 지난달 29일 대우조선해양을 비롯한 조선 3사의 실적 쇼크 등 최근 플랜트부문의 대규모 손실 이면에는 공대의 부실한 교육이 자리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5일 학계에 따르면 전국 주요 대학 화학공학과에서 화공플랜트를 가르칠 수 있는 교수는 20명 안팎이다. 1995년 10명 이상이던 서울대의 관련 전공 교수는 지금은 2명밖에 남지 않았다. 연세대는 2명, 고려대 KAIST 한양대 등은 1명씩이다.플랜트 전공 교수가 급감한 것은 논문 실적 위주의 정부 지원 및 연구 풍토와 관련이 깊다. 교수 평가와 연구비 지원이 논문 편수 등을 잣대로 이뤄지다 보니 대학들은 바이오·나노 등 첨단 분야보다 논문이 적게 나오는 플랜트 전공 교수 채용을 꺼리고 있다.

교수 모자라 ‘枯死 위기’ 플랜트 교육
기업은 고급인력 확보 못해 ‘발 동동’

얼마 전 수도권의 한 사립대는 우여곡절 끝에 화공플랜트를 전공한 A교수를 채용했다. A교수는 유럽에서 박사학위를 받고 다국적 석유화학기업에서 근무하며 실무 경력까지 쌓아 학교 안팎에서 적임자로 평가받았다. 하지만 이 대학은 A교수의 논문 수가 신임교수 채용기준에 모자란다는 이유로 3년 연속 서류전형에서 탈락시켰다. 해당 학과 교수들이 총장을 찾아가 담판을 지은 뒤에야 겨우 A교수를 임용할 수 있었다.

한국의 공과대학에서 과학기술논문인용색인(SCI) 논문 실적 등 정량지표가 주요 평가기준이 되면서 플랜트 엔지니어링 등 산업현장과 밀접한 분야의 교육·연구 기반이 흔들리고 있다. 조선 및 건설업계가 플랜트 부문에서 발생한 부실로 신음하는 배경엔 높은 수준의 엔지니어링 인력을 배출하지 못하고 있는 공대가 있다는 지적이다.

플랜트 과목 자취 감춰…인력배출 ‘막막’플랜트 전공자가 대학 문턱을 넘지 못하는 사례는 쉽게 찾아볼 수 있다. 유럽에 체류 중인 B박사는 화공플랜트 설계와 관련해 해외 유명 저널에 논문을 내고 특허도 여러 건 출원하는 등 탁월한 연구자로 인정받고 있지만 아직 국내 대학에 자리를 잡지 못하고 있다.

최근엔 플랜트 관련 전공을 신설한 서울의 한 대학 교수직에 지원했으나 탈락했다. 역시 신임교수에게 요구하는 논문 수를 채우지 못했다는 게 이유였다. B박사 대신 플랜트와 직접 관련이 없지만 논문 실적을 채운 사람들이 서류 전형을 통과했다. 결국 B박사는 해외 대학의 연구원으로 자리를 옮겼다. 학계 관계자는 “B박사가 끝내 한국에 들어오지 못하고 해외에 정착하면 한국 플랜트업계로서는 큰 손실”이라고 말했다.

각종 대학평가는 물론 두뇌한국21(BK21) 등 국가연구사업이 철저히 논문실적을 바탕으로 한 정량평가에 맞춰진 결과다. 이건우 서울대 공대학장은 “교수들의 논문 편수가 곧바로 정부의 연구비 지원으로 연결되는 시스템이다 보니 대학 입장에서는 논문을 한 편이라도 더 쓸 수 있는 교수를 채용할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최근 서울의 한 사립대 공대는 교수 임용 조건으로 논문 30편 이상을 요구해 물의를 빚기도 했다.

플랜트처럼 산업의 역사가 긴 분야일수록 이 같은 기준을 맞추기 어렵다. 이미 연구가 축적돼 새로운 이론을 내놓기 힘든 데다 산업현장에서 오랜 기간 검증받아야 하기 때문이다. 한종훈 엔지니어링개발연구센터(EDRC) 소장은 “플랜트 분야 연구자 한 명당 연간 평균 논문 수는 바이오·나노 등 첨단 분야의 20% 수준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대학에서 플랜트를 가르칠 교수가 줄어들자 관련 과목도 차츰 자취를 감추고 있다. 서울대 화학생물공학부에선 과거 ‘단위조작’ ‘공장설계’ 등 플랜트 관련 과목이 필수 수강과목이었지만 지금은 과목 자체가 사라졌다. 플랜트 공정 이해에 필수적인 ‘열역학’도 전공필수에서 선택과목으로 바뀌었다.

플랜트업계 기술력 부실로 이어져

부실해지는 대학 교육은 플랜트업계에도 타격을 주고 있다. 한국의 해외 플랜트 수주액은 2004년 83억달러에서 2010년 644억달러로 8배 가까이로 늘었다. 벌크선 등 상선에서 중국 업체들에 쫓기던 조선업계는 2010년대에 접어들면서 해양플랜트 수주 비중을 60~80%까지 늘렸다. 육상 석유화학 플랜트를 주력으로 삼은 삼성엔지니어링의 직원 수는 2003년 1240명에서 2012년 7249명까지 늘어났다. 건설사와 조선업체 사이에 대규모 구인난도 벌어졌다. 기업들이 인력 확보를 위해 앞다퉈 공대 학부 졸업자에게도 고액의 연봉을 안기고 지방의 연구개발(R&D)센터를 서울로 옮겨온 것도 이때다.

하지만 기업들이 ‘인재 전쟁’ 끝에 실무에 투입한 인력 중 상당수는 대학에서 플랜트를 제대로 배운 적이 없었다. 이에 따른 재교육 비용은 고스란히 기업의 몫으로 돌아갔다. 한 건설사 고위 임원은 “당시 연이어 해외 플랜트사업을 수주하면서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았지만 정작 현장에 투입할 만한 인력이 없어 걱정에 밤잠을 설치기 일쑤였다”고 털어놨다. 삼성엔지니어링 출신인 이철진 EDRC 교수는 “플랜트업계는 사원급 직원이 많고 과장·차장급은 매우 적은 피라미드형 인력구조를 갖고 있어 선임자의 경험과 지식이 후배들에게 쉽게 전달되지 않고 있다”고 전했다.고급인력이 부족하다 보니 국내 플랜트업계는 선진국이 독점하고 있는 기획·설계 등 고부가가치 시장엔 손도 못 댄 채 부가가치가 낮고 사업 리스크가 큰 상세설계와 시공에 매달렸다. EPC(설계·구매·시공 일괄도급) 방식으로 저가에 사업을 수주한 탓에 발주처나 외부 엔지니어링업체의 잦은 설계 변경이 고스란히 한국 기업의 비용 증가로 이어지면서 손실 규모가 불어났다. 이 교수는 “해양플랜트 분야는 상부구조물(톱사이드) 설계를 맡은 해외 업체가 작업을 정확히 했는지 평가할 인력도 턱없이 부족하다”고 지적했다. 한 소장은 “플랜트는 전후방 연관효과가 매우 큰 한국의 주력산업인데 정작 대학에선 고사할 위기에 처했다”며 “논문실적 위주의 획일적인 평가체계가 바뀌지 않으면 곧 중국에 따라잡힐 것”이라고 우려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