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0년 만에 베일 벗는 '서울대 희귀고서'

해외서도 구하기 힘든 '국부론 2판'·'인구론 1806년판'·'에밀초판'…

경성제국대학 시절 장서 재조명…4일 학술대회

경성제대때 수집한 55만권 중 광복후 서울대 30여만권 소장
그중 귀중본만 574권 달해

동서 교류사 관련 서적 등 본격적인 학술연구 첫 시도
송지형 학예연구사가 2일 서울대 중앙도서관 고문헌자료실에서 ‘중국전례보고서’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오형주 기자
서울대 중앙도서관은 4일 ‘경성제국대학(경성제대) 도서관 연구’를 주제로 학술대회를 연다. 경성제대 시절 장서에 대한 본격적인 학술연구가 이뤄지는 것은 이번이 처음이다. 장서는 30여만권으로 중앙도서관 4층 고문헌자료실에 보관돼 있다. 어떤 책들이 남아 있고 그 의미는 무엇인지에 학계 이목이 쏠린다.

○1762년 출간 ‘에밀’ 등 희귀본 눈길2일 오전 기자가 방문한 고문헌자료실 서가는 서늘했다. 도서관 관계자는 “자료 보존을 위해 항상 18~20도 온도를 유지하고 있다”고 설명했다. 서가를 가로질러 향한 곳은 고문헌 중에서도 17세기 이전 출간됐거나 소장가치가 높은 책만 모아 놓은 ‘귀중본서고’. 신발을 벗고 슬리퍼로 갈아 신어야 들어갈 수 있는 이 서고는 벽면이 모두 나무로 마감돼 마치 거대한 사우나를 연상케 했다. 오동나무 재질의 보관함 속에 놓인 귀중본 645권 중 574권(89%)은 과거 경성제대 부속도서관 소장본이다.

유럽 등 현지에서도 구할 수 없는 희귀본이 눈에 들어왔다. 1817년 출간된 애덤 스미스의 ‘국부론’ 2판, 토머스 맬서스의 ‘인구론’ 1806년판, 1680년 간행된 토머스 홉스의 ‘비히모스’, 장자크 루소의 ‘에밀(1762년 초판)’ 등이다.

이번 학술대회를 맞아 특히 관심을 끄는 책은 1701년 중국에 있던 예수회 선교사들이 라틴어로 펴낸 ‘중국전례보고서’다. 여기에는 청나라 4대 황제 강희제가 밝힌 천주교에 대한 입장이 담겨 있다.안재원 서울대 인문학연구원 연구교수는 “1703년 오스트리아 빈에서 나온 초판본에 없는 만주어와 한문 원문이 실려 있다는 점에서 베이징의 청 황실에서 간행된 최초의 원전일 가능성이 매우 높다”고 했다.

○경성제대 예산 20% 투입해 수집1926년 경성제대 설립과 함께 마련된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은 1945년 일제가 2차 세계대전에서 패망할 당시 55만권의 장서를 보유한 한반도 최대의 도서관이었다. 현재 서울대 중앙도서관이 460여만권의 장서를 보유한 것과 비교해도 작지 않은 규모다.

당시 기록에 따르면 일제는 경성제대 도서관의 장서를 확충하는 데 심혈을 기울였다. 1927년 7만7000여권에 불과했던 장서는 1932년 35만권, 1937년에는 44만권으로 급증했다. 1926~1928년 경성제대 부속도서관의 도서 구입비는 약 80만엔으로, 같은 기간 경성제대 총예산 400만엔의 20%에 달했다. 당시 조선총독부도서관(현 국립중앙도서관)의 연간 예산이 8만엔에 불과했을 때다. 경성제대는 독일의 경제학자 베르너 좀바르트로부터 3254책 등 서양 유명학자의 장서를 통째로 구입해오기도 했다.

경성제대 도서관의 이런 방대한 장서를 두고 학계에서는 일제가 시도한 ‘보편적 교양’에 근거한 식민지 지배체제 구축 전략의 일환이라고 보는 해석도 있다. 식민통치에 대한 영국 등 해외 학술서는 물론이고 인도·아프리카와 관련한 영국 의회보고서, 영국·네덜란드 동인도회사에 대한 문건도 상당수 포함돼 있어서다.정근식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일제는 치열한 경쟁을 거쳐 경성제대에 입학한 조선인에게 서양서 위주의 교양교육을 통해 그들이 ‘제국적 엘리트’로서의 자기정체성을 갖도록 유도했다”고 설명했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