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벼랑 끝 한국기업] 언제든 부도날 기업 170곳…'고위험군' 비중 미국의 2배·일본의 5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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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존 골든타임 지나간다올초 국내 굴지의 한 화학회사 임원들은 증권사 회계법인 사모펀드(PEF) 등 투자은행(IB)업계 관계자들과 연달아 만났다. 이들은 “유가 하락으로 글로벌 화학업계가 생존의 기로에 섰는데 이 위기를 타개할 아이디어가 있느냐” “우리 회사 사업 중에 무엇부터 정리해야 한다고 보느냐” 등의 질문을 집중적으로 던졌다. IB업계는 대규모 사업재편이 임박한 것으로 봤다. 그로부터 8개월이 지난 지금, 이 회사는 묵묵부답이다.외과 수술 필요한데수출의 버팀목인 한국 제조업은 고도성장기를 구가하며 나름의 경쟁력을 쌓았기에 내성이 강하다는 평가를 받아왔다. 한국이 1997년 외환위기를 기민하게 벗어날 수 있었던 것도 강력한 제조업 기반이 있었기 때문이라는 게 정설이다. 기업들의 혁신 의지도 강했고 사업모델 재편도 역동적이었다.
(1) 말로만 비상경영…선제적 사업재편 실종
노조, 사업재편을 수당 챙길 '꽃놀이패' 인식
외형 집착 오너 2, 3세는 "버티면 호전될 것"
하지만 “지금은 제조업 위기의 진행 경로와 복원력이 과거와 확연히 다르다”(홍성국 KDB대우증권 사장)는 진단이다. 미세조정만으로 급변하는 산업 지형에 대처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2008년 글로벌 금융위기에 직격탄을 맞았던 조선·해운·건설 업종은 아직 기력을 되찾지 못하고 있다.
오히려 중국의 거센 추격과 신흥국 경기 침체에 철강 화학이 무너져 내리더니 이젠 전자 자동차로 부실 징후가 확산되고 있다. 취재차 만난 한 시중은행의 임원 얘기다. “경기 안산공단을 한번 둘러보세요. 전자부품업체 가동률이 지난해의 절반 수준도 안 됩니다. 정말 심각해요.”그럼에도 삼성 정도를 제외하고는 ‘외과 수술’을 시도하는 기업이 거의 눈에 띄지 않는다. 한 대기업 임원은 “중요성을 알면서도 못하는 것이 선제적 구조조정”이라며 “합병과 분할에 대한 기업들의 경험 부족과 사업재편을 별도 수당을 챙기는 ‘꽃놀이패’로 여기는 노동계가 문제”라고 지적했다.
경영자들의 판단착오까지
하지만 경영진의 무사안일주의, 오너들의 그룹 외형에 대한 집착도 사업재편을 가로막는 걸림돌이다. “위기가 턱밑까지 차올라도 심각성을 모르는 오너 2,3세들이 많다”(IB업계 관계자)는 힐난을 심심찮게 들어볼 수 있다. 채권단과 재무구조개선약정을 맺고난 뒤에도 구조조정과 사업재편을 미적거리는 그룹의 상당수가 오너들 탓이라는 게 은행들의 푸념이다.이미 부실화가 상당 부분 진행된 A건설회사와 B조선회사도 “계속 버티면 상황이 호전될 것”이라는 오너의 고집으로 채권단이나 IB업계가 권유하는 사업부 분할매각을 거부하고 있다는 전언이다. 금융회사의 한 관계자는 “형제간 분할경영이나 자녀들에 대한 분할상속을 위해 계열사 매각을 꺼리는 경우도 많다”고 전했다. 이 같은 상황에서 전문경영인이 직(職)을 걸지 않고선 오너에게 과감한 구조조정을 건의하기가 어렵다는 얘기다.
대기업뿐만 아니라 중견·중소기업들도 마찬가지다. 제법 알 만한 반도체 공정업체 C사는 최근 컨설팅업체로부터 해외 사업장을 매각하라는 조언을 받았다. 매출과 영업이익이 3년째 하락하는 상황에서 일단 실탄을 확보하고 향후 신성장 기회를 엿보라는 권유였다. 하지만 이 회사는 컨설팅 결과를 받아들이지 않았다. “해외사업장에 나가 있는 창업 공신들을 해고할 수 없다”는 이유에서였다. 올해 이 회사의 반기 실적은 지난해 대비 3분의 1로 줄었다.부실기업은 계속 늘어나기업들이 이런저런 이유로 변화를 게을리하는 사이 한국 제조업의 체력은 갈수록 떨어지고 있다. 한국경제신문이 단독 입수한 글로벌 구조조정 컨설팅 회사 알릭스파트너스의 ‘기업 부실화 위험지수’ 분석 결과에 따르면 내년 중 워크아웃 및 법정관리 위험이 있는 국내 상장사는 417개로 분석 대상 1544개(현재 도산기업 등 제외)의 27%를 차지하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이 가운데 전체의 11%에 달하는 고위험군 170개사는 당장 구조조정을 하지 않을 경우 3분기 내 도산이 거의 확실시되는 기업이다. 미국(7%), 유럽(4%), 일본(2%)보다 수치가 월등히 높다. 저위험군 247개사는 가까운 장래에 구조조정이 필요한 기업으로 분류됐다.
업종별로는 화학과 철강의 부실 기업 증가 속도가 두드러진다. 화학업은 지난해 고위험군이 2%였지만 올해 7%, 철강업은 10%에서 18%로 각각 급증했다. 자동차는 4%에서 8%로, IT·전자 업종도 8%에서 11%로 각각 늘었다. 정영환 알릭스파트너스 대표는 “고위험군 기업들이 자동차 전자로 빠른 속도로 나타나고 있다”며 “지금 멀쩡한 것 같아도 선제적 구조조정을 하지 않으면 낭패를 겪게 될 기업이 부지기수”라고 진단했다.
한국경제신문이 에프앤가이드에 의뢰해 분석한 상장사들의 자기자본이익률(ROE) 추이도 비슷한 결과가 나왔다. 시가총액 1조원 이상의 상장사 중 ROE가 연속 2년 하락한 기업은 전체 189개 중 58개(30%)로 집계됐다.
■ 417개한국 상장기업 중 세 분기 내에 법정관리 및 워크아웃 가능성이 있는 위험 기업의 숫자. 글로벌 구조조정 컨설팅사 알릭스파트너스가 상장사의 재무분석 및 정성적 평가를 통해 내놓은 지표다. 조사대상 1544개의 상장사 중 27%에 해당한다.
유창재/김태호 기자 yoocool@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