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천국의 날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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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초가을 남해는 지중해 물빛이다. 햇살이 사금파리처럼 부서지는 바다 위로 파란 물감을 들이부은 듯한 하늘도 그렇다. 짙은 군청색과 맑은 푸른색을 섞은 아청빛 색감. 바다와 하늘이 동시에 빚어낸 색채의 향연이다.
가천 다랭이마을에서 앵강다숲 쪽으로 이어지는 바래길 풍경도 상큼하다. 바래길은 남해 섬을 한 바퀴 걸어 도는 해안도로. ‘바래’는 이곳 토속어로 썰물 때 갯벌과 바위에서 바지락과 해산물을 채취하는 일을 말한다. 젊은 아낙들의 땀내와 젖내음이 함께 밴 그 길을 따라 해안선이 부드럽게 휘어지며 낭창거린다.가을 볕에 알곡들이 여물어가는 들판을 지나 층층계단 논둑길을 오르니, 맑은 하늘에서 유리알 같은 햇살이 쨍 떨어진다. 조금 있으면 산언덕 밭두렁 사이로 억새꽃이 은색 군무를 출 것이다. 남해 금산 활엽수림도 곧 단청옷을 입으리라. 물건방조어부림의 숲소리며 송정 솔바람해변의 물소리는 또 얼마나 정겨울지.
초가을 풍경은 어디서나 아름답다. 추일서정(秋日抒情)의 우수와 고독도 멋스럽다. 이 무렵 평창 봉평에선 메밀꽃이 산언덕을 하얗게 수놓는다. 소금을 뿌린 듯 하얀 꽃밭이 ‘흐붓한 달빛에 숨이 막힐 지경’이다. 인제 산골의 자작나무 숲에서는 갈바람에 백화(白樺)잎 나부끼는 소리가 사각거리고…. 만산홍엽(滿山紅葉)의 물결은 꽃천지보다 붉다.
발 끝에 와 닿는 산길의 감촉은 얼마나 산뜻한가. 늦여름 물기 다 빼고 마알갛게 몸을 말린 바위를 타고 오르는 산행의 진미. 아침저녁으로 바뀌는 산의 빛깔과 호젓한 숲길의 낭만은 이즈음 누릴 수 있는 최고의 풍요다. 개암과 도토리 열매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으며 다정한 사람과 함께 걷는 길이면 더욱 좋다. 발그레하게 단물이 드는 사과와 포도의 과즙처럼 달콤한 호사라니!굳이 멀리 가지 않아도 된다. 제주 올레길이야 너무나 유명해서 그렇다 치고, 서울에선 수락산과 북한산을 휘감아도는 둘레길 따라 이 가을의 흥취를 마음껏 즐기면 된다. 춘천에선 봄내길을 굽이 돌며 유유자적할 수 있다. 양평 물소리길과 소백산 자락길, 동해 해파랑길, 부산 갈맷길, 경북 외씨버선길 등 수많은 걷기 코스가 전국에 있다.
오늘따라 유난히 하늘이 높고 푸르다. 코끝을 간지르는 바람의 내음과 색깔도 다르다. 가을 바람에는 낙엽 태우는 향기가 묻어 있다. 구름은 맑고 공기는 청명하다. 천국의 날씨가 따로 없다. 그 속으로 한 마리 새가 푸른 금을 그으며 날아간다. 내일은 어디로든 떠나야겠다.
고두현 논설위원 kdh@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