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로시티'로…느릿느릿 가을 여행
입력
수정
지면E1
걷는 길마다 삶이 보이는 청산도아침 저녁으로 소슬한 바람이 불고 햇살도 한결 유순해졌습니다. 가을바람이 불면 그 어느 때보다 여행에 대한 갈망이 커집니다. 해외여행도 좋고 유명한 관광지를 둘러보는 것도 좋지만 자신을 되돌아보고 사람들과 따뜻한 정을 나눌 수 있는 여행지를 찾아보는 것은 어떨까요? 느리고 여유롭게 걸어서 여행할 수 있는 여행지를 슬로시티라고 합니다. ‘유유자적한 도시, 풍요로운 마을’이라는 뜻의 이탈리아어 ‘치타슬로(cittaslow)’의 영어식 표현이죠.
진도아리랑 부르며 내려온 '서편제' 그 길을 걷다
"성긴 담벼락에는 이끼가 끼고,돌담 사이에서
자라는 담쟁이덩굴에는 더딘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가을이 깊어지면 담쟁이가 담벼락을 붉은색으로 물들인다.
청산도 내에는 주요 여행지를 오가는 슬로시티 순환버스가
배 시간에 맞춰 오간다. 굳이 승용차를 타고 들어서지 않아도
'쉼표'를 찍으며 슬로시티를 탐닉할 수 있다."
해송숲 속삭임에, 고택(古宅)의 여유로움에 묻혀…일상에 지친 마음 치유
슬로시티 여행지 6선
모든게 더딘 증도 태평염전…해무 걷힐무렵 몽환적 분위기
수려한 주왕산이 품은 청송…백자·한지 등 전통문화 체험
슬로시티에 가입하려면 인구가 5만명 이하이고, 도시와 주변 환경을 고려한 환경정책을 시행해야 하며, 유기농 식품의 생산과 소비, 전통음식과 문화 보존 등의 조건을 충족해야 합니다. 국내에는 아시아 최초로 지정된 전남 담양군 창평면 삼지천마을, 완도군 청산도, 신안군 증도를 비롯해 충남 예산군 대흥면 등 11곳이 있습니다. 그중에서 세계 슬로길 1호로 지정된 완도군 청산도의 슬로길을 직접 걸어보았습니다.슬로푸드, 염전, 한지, 옹기 등 마을마다 특색 많은 체험 프로그램이 있고 걷는 길이 아름다운 슬로시티 6곳도 같이 소개합니다. 얼굴을 스치는 바람을 맞으며 아이들과 함께하는 체험 여행으로 슬로 시티로 떠나보는 것은 어떨까요?완도 청산도는 더딘 풍경으로 삶의 쉼표가 되는 섬이다. 푸른 바다와 산, 구들장 논, 돌담길 등은 슬로시티 청산도를 대표하는 이미지다. 청산도의 마을과 마을을 잇는 길도 슬로길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청산도 슬로길은 제주올레, 지리산 둘레길 등과 함께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길의 반열에 올랐다. 국제슬로시티연맹은 2011년 청산도 슬로길을 세계 슬로길 1호로 공식 인증했다.
아시아 최초 슬로시티…영화 ‘서편제’의 고향청산도는 걸어야 제격이다. 비가 오든, 바람이 불든 섬 곳곳에서 가벼운 배낭을 메고 걷는 사람들을 만난다. 걷기 여행자에게 필수 방문지가 된 청산도는 슬로길 11개 코스를 갖췄다. 길마다 걸맞은 풍경이 어우러지고 사연이 차곡차곡 쌓인다. 총 42㎞에 이르는 슬로길 전체 코스를 걷는 데 꼬박 2박3일이 걸린다지만, 여행자의 얼굴에는 지친 기색이 없다. 모두 여유롭고 행복한 표정이다.
청산도는 2007년 신안 증도, 담양 창평 등과 함께 아시아에서 처음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돌멩이로 투박하게 쌓아 올린 담장, 바다와 어우러진 다랭이논, 얕은 바다에 그물을 친 뒤 줄다리기 하듯 전통 방식으로 고기를 잡는 휘리, 제주에서 건너와 정착한 해녀의 미소…. 청산도의 자연과 사람이 모두 슬로시티로 지정된 배경이다. 섬이 지향하는 슬로건 역시 ‘삶의 쉼표가 되는 섬’이다. ‘느림의 종’, 쉼표 조형물 등 느림을 형상화한 조각물이 곳곳에 있다. 뭍에서 청산도를 오가는 여객선 이름도 ‘아시아 슬로시티호’ ‘슬로시티 청산호’다.청산도의 이런 이미지에는 영화 한 편이 큰몫을 했다. 청산도항에서 당리 언덕길을 오르면 영화 ‘서편제’ 촬영지가 모습을 드러낸다. 주인공들이 ‘진도아리랑’을 부르며 내려오는 장면은 느리게 흘러가는 청산도의 시간을 반영한다. 당리 언덕길은 봄이면 청보리, 가을이면 코스모스로 단장한다. 드라마 ‘봄의 왈츠’를 촬영한 화랑포전망대까지 아우르는 이 길은 청산도를 대표하는 슬로길 1코스다. 당리 언덕에서 내려다보면 배가 드나드는 청산도항과 도락리 마을이 아득하게 펼쳐진다. 슬로시티 청산도가 그림엽서처럼 한눈에 담긴다.청산도의 시골 삶터가 궁금하다면 슬로길 7코스 상서마을에 가보는 것이 좋다. 상서리는 마을 전체가 구불구불한 돌담으로 채워졌다. 바람 많은 청산도의 돌담은 처마까지 층층이 솟았다. 미로 같은 돌담 골목을 배회하다 보면 발걸음도 느리게 머뭇거린다. 성긴 담벼락에는 이끼가 끼고, 돌담 사이에서 자라는 담쟁이덩굴에는 더딘 세월의 흔적이 묻어난다. 가을이 깊어지면 담쟁이가 담벼락을 붉은색으로 물들인다. 상서마을은 2014년 국립공원 최고 명품마을로 지정됐다.
청산도에서 볼 수 있는 인상적인 풍경 가운데 구들장 논이 한몫한다. 논바닥에 돌을 구들처럼 깔고 흙을 부어 만든 논으로 그 아래 배수로가 연결된 모양새다. 자투리땅을 활용해 농사를 짓던 이색적인 논과 경작 방식은 국가중요농업유산이자 세계중요농업유산으로 등재됐다. 슬로길 6코스를 지나다 보면 구들장 논을 구경할 수 있다.청산도 곳곳에서 만나는 해변은 독특한 풍광으로 섬의 변화무쌍한 모습을 전한다. 신흥마을 풀등해변(슬로길 7코스)은 썰물 때 모래섬이 드러나는 신비로운 광경을 간직한 곳이다. 진산마을 갯돌해변(슬로길 8코스)은 동글동글한 갯돌이 잔잔한 울림을 준다. 지리해변(슬로길 10코스)은 200년이 넘은 해송 숲과 1㎞ 남짓한 백사장이 어우러져 일몰이 아름다운 곳이다. 하룻밤 묵을 요량이면 작은 포구가 있고 예능 프로그램 ‘1박2일’ 촬영지로 알려진 신흥마을이 고즈넉하다.
예전에 북적이던 삶의 단상 역시 섬 한편에 고스란히 담겼다. 슬로길 11코스의 청산항 일대는 1930년대부터 1970년대 후반까지 고등어와 삼치 파시가 열리던 포구다. 청산항 포구 안쪽 안통길은 파시문화거리로 조성돼 옛 모습을 조명한다.
청산도 표 슬로푸드 일품
청산도 곳곳은 더디게 걷는 길이 미역줄기처럼 이어진다. 청산도 남쪽 범바위(슬로길 5코스)에는 섬 전체를 한눈에 조망할 수 있는 전망대가 자리 잡았다. 전망대 외관도 슬로시티 상징인 달팽이 모양이다. 맑은 날이면 거문도, 제주도까지 보인다. 읍리에 있는 청동기시대 지석묘(고인돌), 서남 해안의 군사적 요충지였음을 보여주는 청산진성(슬로길 3코스) 등은 청산도의 역사를 낱낱이 보여준다.
해마다 4월이면 청산도슬로걷기축제가 열린다. 번잡한 여름을 보내고 10월이 오면 ‘청산도 가을의 향기’도 펼쳐진다. 슬로길 9코스 단풍길이 가장 붉고 아름답게 물들 때다.
폐교를 되살린 느린섬여행학교(slowfoodtrip.com)에서 청산도의 다양한 슬로 라이프를 경험하는 것도 뜻깊은 시간이다. 전통 어로 휘리, 조개공예 체험 외에도 청산도에서 나는 청정 재료로 만든 슬로푸드를 맛보는 기회가 마련된다. 청산도 내에는 주요 여행지를 오가는 슬로시티 순환버스가 배 시간에 맞춰 오간다. 굳이 승용차를 타고 들어서지 않아도 ‘쉼표’를 찍으며 슬로시티를 탐닉할 수 있다.
▶▶여행 정보
완도에서 청산도까지 가는 여객선은 완도여객터미널(1566-0950)에서 하루 8회 운항하며 50분 정도 걸린다. 신분증을 반드시 지참해야 한다. 여객선 시간표와 예약은 가보고싶은섬(island.haewoon.co.kr) 홈페이지에서 하면 된다. 느린섬여행학교(061-554-6962)에서는 체험과 함께 식사와 숙박을 할 수 있다. 지리민박(061-552-8801)과 경일모텔(061-554-8572) 등에서 묶는 것이 좋다. 바다식당(061-552-1502)의 매운탕이 얼큰하고 시원하다. 쫄깃한 자연산 회를 먹고 싶다면 자연식당(061-552-8863)이 좋다. 슬로길을 걸은 뒤 숭모사와 드라마 ‘피노키오’의 세트장을 둘러볼 수 있다. 슬로시티 청산도(slowcitycheongsando.co.kr) 홈페이지에서 더 다양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염전, 갯벌, 해송숲 갖춘 신안 증도
신안 증도는 섬 안의 모든 것이 더디게 흘러간다. 해무가 걷힐 무렵 태평염전 길은 몽환적인 분위기에 휩싸인다. 소금 창고들이 가지런히 늘어선 이곳 갯벌 염전은 국내 최대 규모다. 증도가 세계슬로시티로 지정된 데도 갯벌 염전이 중요한 이유가 됐다. 증도는 유네스코 생물권보전지역으로도 승인된 곳이다.
갯벌도립공원은 우전해변에서 화도까지 광활하게 연결된다. 물이 빠지면 짱뚱어, 농게, 칠게 등의 향연이 펼쳐진다. 짱뚱어다리 건너편의 우전해변을 운치 있게 거니는 방법은 소나무 10만여그루가 늘어선 ‘한반도 해송숲’을 택하는 것이다. 솔숲을 거닐며 일몰의 증도해변과 만나는 시간은 느리게 걷기에 방점을 찍는다. 염생식물원, 화도노두길 등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061)240-8357돌담이 있는 고택 마을, 담양 창평
담양군 창평면은 고려 시대부터 존재하던 마을이다. 조선 정조 때는 2400가구에 인구가 7600명이 넘는 고을이었다. 1914년 조선총독부가 행정구역을 개편하면서 담양군에 편입되기까지 일대에서는 담양과 견줄 정도로 컸다. 고씨 집안의 고택과 문화재로 지정받은 옛 담장이 유구한 역사를 대변한다.
창평면은 2007년 신안 증도, 완도 청산도 등과 함께 아시아에서 처음 슬로시티로 지정되며 다시 주목받았다. 월봉천과 운암천, 유천 등 세 갈래 물길이 만나 삼지내(삼지천)마을로도 불리는데, 창평의 역사와 유산에 대한 마을 사람들의 자부심이 남다르다.
마을 여행은 이야기길 3개 코스를 따라 일대를 크게 둘러볼 수도 있고, 돌담 중심으로 알차게 탐험할 수도 있다. 쌀엿과 한과 등이 유명하며, 다채로운 슬로시티 체험을 할 수 있다. (061)383-3807
자연에서 몸과 마음을 치유하는 청송
푸른 솔의 고장 청송(靑松)은 산과 숲으로 둘러싸인 지역 특색을 살린 산촌형 슬로시티다. 남보다 빨리 가기보다 자연의 속도에 맞춰 살면서 함께하는 즐거움을 찾는다. 경관이 수려한 주왕산과 주산지, 선조의 생활 문화를 고스란히 간직한 덕천마을과 중평마을, 전통문화의 멋을 느낄 수 있는 청송백자와 천연 염색, 전통 한지, 옹기까지 다양한 매력이 넘친다.
송소고택을 중심으로 한 덕천마을이 있는 파천면, 주왕산과 주산지가 있는 부동면이 2011년 국제슬로시티로 지정됐다. 덕천마을에서는 고택 체험을 기본으로 민속놀이, 다듬이질, 천연 염색, 농사 체험을 할 수 있다. 닥나무가 한지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는 전통 한지 체험, 재래식 수작업으로 빚는 청송백자와 청송옹기 체험도 특별하다. (054)873-7686
쌀·곶감·누에고치의 고장 상주
넓은 들녘에서 난 쌀, 하얀 분으로 덮인 달콤한 곶감, 질 좋은 명주실을 생산하는 누에고치가 경북 상주의 삼백(三白)이다. 슬로시티 상주는 삼백의 이미지를 살려 ‘화이트 슬로시티’를 슬로건으로 한다. 느리게 완성되는 세 가지 아름다움이 슬로시티의 정신에 맞아떨어진다.
상주는 2011년 6월 슬로시티로 지정됐다. 함창읍·공검면·이안면 지역을 대상으로 한다. 함창명주박물관에 가면 상주슬로시티방문자센터가 있으며, 바로 옆에 명주테마파크, 경상북도잠사곤충사업장에서 운영하는 누에곤충체험학습관과 나비생태원, 천연 염색을 체험할 수 있는 공방 등이 한자리에 모였다. 허씨비단직물, 상주옹기장, 함창향교, 상주공검지, 이안면 백련단지 등도 함께 둘러보면 좋다. (054)541-9763
느리고 한갓지게, 예산 대흥
충남 예산의 슬로시티 대흥은 예당저수지 주변을 아우른다. 그 가운데 대흥면 교촌리, 동서리, 상중리가 슬로시티의 중심이다. 대흥읍성이 있던 자리로, 과거 백제 부흥군의 거점이었던 봉수산 임존성 자락 아래다. 교과서에 실린 ‘의좋은 형제’ 이야기가 유래한 마을이기도 하다. 역사와 전통, 자연 생태가 슬로시티 취지에 부합한다.
슬로시티 대흥을 여행하는 방법은 여럿이지만 발끝으로 천천히 누려보는 게 으뜸이다. 느린꼬부랑길이나 손바닥정원길은 처음 방문하는 여행자도 쉽게 돌아볼 수 있는 코스다. 느린꼬부랑길은 마을의 자연과 역사를, 손바닥정원길은 마을 사람들이 직접 가꾼 정원과 슬로시티의 사람을 만날 수 있다. 슬로시티방문자센터에서 지도를 구한 뒤 출발하면 좋다. 매월 둘째 토요일에는 의좋은형제공원에서 의좋은형제장터가 열린다. (041)331-3727청풍호가 보이는 산야초 마을 제천 수산
충북 제천 청풍호 동쪽에 자리 잡은 수산면이 2012년 10월 슬로시티 인증을 받았다. 청풍호, 금수산, 자드락길 등 자연 풍광이 아름다운 데다 산야초마을과 능강솟대문화공간 등 체험 공간이 다양해 힐링 도시의 면모를 잘 구현했다는 평가를 받았다. 슬로시티 수산을 가장 잘 경험할 수 있는 곳이 청풍호자드락길 6코스 괴곡성벽길이다. 들머리인 옥순봉쉼터에서 한 시간 정도 가면 백봉전망대에 닿는데, 이곳에서 바라보는 청풍호가 절경이다.전망대에서 내려와 산야초마을로 향한다. 청풍호를 바라보는 야트막한 언덕에 자리 잡은 마을로, 비누 만들기와 손수건 염색 등 다양한 체험을 할 수 있다. 솟대를 모아놓은 능강솟대문화공간과 금수산 의상대 아래 자리한 정방사도 느리게 사는 마을 수산면을 느끼기에 모자람이 없다. (043)642-8311
최병일 여행·레저전문기자 skycb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