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대론 대한민국 미래 없다] "실수하지 말고 중간만 가자"…도전·창의 막는 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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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경 창간 51주년 기획실수 한 번이 인생을 좌우하는 잘못된 성과 보상 체계가 결과에 대한 무사안일을 부추기고 있다. 펀드매니저업계가 대표적이다. 일반적으로 최소 3년 이상의 주식투자 실적을 기준으로 성과를 평가하는 미국 등 금융 선진국과 달리 한국에서는 짧게는 3개월, 길게는 1년 단위로 펀드 수익률에 대한 평가가 이뤄진다. 독창적인 관점으로 상장사를 연구해 미래 우량주를 발굴하기보다는 다른 펀드매니저가 많이 보유하는 ‘유행하는 주식’을 따라 사서 평균 정도의 수익률을 기록하는 게 장수 비결이라는 한탄이 나온다. 안동현 서울대 경제학부 교수는 “예컨대 10억원을 벌었을 때 보상 수준은 낮고 1억원 잃었을 때 해고되면 누구나 도전을 기피하는 ‘위험 중립적’인 성향을 갖게 된다”며 “우리 사회의 성과 보상 체계가 위험 회피에 치우쳐 있는 게 문제”라고 진단했다.
실력 아닌 '실수 평가'로 병드는 한국
실수 안 하기 경쟁
10억 벌면 '찔끔 보상'…1억 손실나면 해고하는 시스템
펀드매니저도 위험 회피 급급
정교한 실력 검증시스템 없어 사회 역동성 계속 갉아먹어
○실수 안 하기로 변질된 경쟁우리 사회 곳곳에서 ‘실수 안 하기 경쟁’이 벌어지고 있는 것은 도전 과정에서의 실수를 꼬투리 잡아 끌어내리려는 하향 평준화 성향, 경쟁의 과정보다 겉으로 드러난 결과를 중시하는 사회 의식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결과라는 게 전문가들의 분석이다.
한준 연세대 사회학과 교수는 “사회 의식이 기회의 평등보다는 결과의 평등을 강조하다 보니 치열한 경쟁 결과에 차등이 생기는 것을 용납하지 않는 분위기가 만연해 있다”며 “그러다 보니 경쟁 과정에서의 실수를 빌미 삼아 끌어내리려는 풍조가 확산된 것”이라고 말했다. 이른바 ‘물수능’(쉬운 수학능력시험)이 단적인 사례다. 한 교수는 “창의적이고 도전적이다 보면 실수가 생길 수밖에 없다”며 “우리 사회가 ‘튀는 사람’을 싫어하다 보니 ‘중간쯤 가는 사람’을 양산하는 부작용을 낳고 있다”고 설명했다.고위 공직자의 인사 검증이나 국회 인사청문회 과정에서 ‘국민 정서법’의 잣대를 들이대는 것도 비슷한 현상이란 지적이다. 리더로서의 자질과 능력을 따지기보다는 과거 사소한 잘못까지 들춰내 낙마시키거나 공개적인 망신주기로 몰아가는 것도 왜곡된 평등의식의 발로라는 것이다. 결과적으로 ‘적당히 실수 안 하는 사람’을 선호하는 분위기를 부추겨 창의력과 역동성을 저해하고 사회 발전을 가로막는다는 지적이다.
○조급증과 무사안일만 팽배
안정형 인간을 양산하는 ‘실수 안 하기 경쟁’의 폐해는 교육현장에서부터 나타나고 있다. 이재열 서울대 사회학과 교수는 “학생들이 고등학교 때부터 악착같이 실수 안 하기에 신경쓰다 보니 ‘순응주의 경향’이 점점 심해지고 있다”며 “강의 시간에도 강의 내용에 대한 반론과 토론보다는 과제 분량과 마감 시한을 놓치지 않으려고 질문하는 경우가 많다”고 전했다.이미 사회 곳곳에선 ‘사라진 도전의식’에 대한 경고등이 켜졌다. 윤증현 전 기획재정부 장관은 “미래 인재들이 공무원이나 공공기관 등 창의성을 요구하기보다는 안정성을 갖춘 분야에 몰리는 것은 도전의식 부재의 한 단면”이라며 “우리 사회의 희망이 사라지고 있다는 방증”이라고 우려했다. 안 교수는 “실수 같은 시행착오 과정 없이는 발전이 없다”며 “시행착오를 받아들이지 않는 얕은 사회 풍토에서는 조급증과 무사안일만 넘쳐날 수밖에 없다”고 지적했다.
산업 현장에서 기업가 정신이 사라지는 것도 실수를 용납하지 않으려는 사회 의식과 무관하지 않다는 지적이다. 정갑윤 국회 부의장은 “경영상 판단조차 사법적 잣대를 들이대 배임죄를 적용하니 기업인들도 책임을 지고 적극적인 투자에 나서지 못하고 있는 것”이라고 말했다. 전문가들은 개인의 실수를 감싸줄 수 있는 사회 문화가 필요하다고 조언했다. 시행착오나 실수가 발전의 밑거름이 될 수 있는 만큼 기다려줄 수 있는 관용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재열 교수는 “문제가 생겼을 때 희생양을 찾는 게 아니라 조직 차원에서 근본적인 개선점을 찾는 게 중요하다”고 말했다.
황정수 기자 hj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