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키 큰 세 여자' 박정자·손숙의 호흡, 전우처럼 빛났다

연극 리뷰
오는 25일까지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공연하는 연극 ‘키 큰 세 여자’.
극작가 에드워드 올비의 양어머니는 키가 큰 여성이었다. 남성보다 크고 건장한 체격 때문에 그는 남들보다 강인해야 한다는 사회적 편견을 강요받는다. 어려운 환경에서 가장 노릇을 해야 했고, 가난 때문에 부자와 결혼했다. 스스로를 강하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내몰았다. 입양아인 올비와도 불화가 생겼고, 그의 삶은 행복하지 못했다. 그를 강하고 독선적인 성격으로 내몰았던 큰 키는 나이가 들며 줄었고, 그의 삶도 쪼그라들어갔다. 큰 키 때문에 생겨난 비극이다.

연극계의 대모 박정자와 손숙은 이 비극적인 이야기를 사랑스럽고 재치있게 그려냈다.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개막한 에드워드 올비의 자전적 작품 ‘키 큰 세 여자’(국립극단 제작)에서다.이 작품은 귀족적이고 자존심 강한 90대 노인 A, 50대 중년 간병인 B, 20대 젊은 재산관리인 C의 대화로 이뤄진다. 1막은 기억이 온전하지 못한 A가 B와 C에게 자신의 파편화되고 왜곡된 기억들을 쏟아내는 과정이 반복되며 정신없이 전개된다.

A는 B와 C에게 괜한 심통을 부리기도 하고, 집을 떠난 아들을 생각하며 화를 내기도 한다. “난 쪼그라들었어! 옛날엔 그렇게 컸는데! 왜 쪼그라든 거야?”라고 울먹이는 A에게 B는 “시간이 가면 그렇게 돼요. 다 작아져요. 매일매일 작아져요”라고 위로한다.

산만하게 흩어진 이야기의 조각은 2막이 돼서야 하나로 꿰어진다. A가 심장발작으로 쓰러진 가운데 세 사람은 A의 20대, 50대, 90대 자아가 되어 지나간 삶의 순간을 돌아본다. 1막에서 세 사람이 신체적·정신적으로 소멸해가는 과정을 그렸다면, 2막은 인생에서 가장 행복한 시점은 언제인지를 묻는다.A와 B는 역설적으로 쪼그라든 지금 이 순간이 가장 행복한 순간이라고 말한다. 가장 행복한 순간은 어디 있느냐고 묻는 20대의 C에게 50대 B는 말한다. “인생을 산에 비유했을 때 쉰이면 그 정점이라는 거야. 지금이 좋은 건 이제 겪지 않아도 될 일이 많다는 거야. 인생 한중간 정점에 이렇게 서 있다는 건 분명히 가장 행복한 시간일 거야.”

무대의 ‘전우’라는 박정자와 손숙의 호흡이 빛난다. 두 사람의 대화를 따라가다 보면 ‘늙음에 대해’ 곱씹어보게 된다. 특히 제멋대로에 아무에게나 심통을 부리는 90대 노인에서 인생의 지혜를 가진 우아하고 품위 있는 90대 자아로 변신한 박정자의 연기가 아름답다. 오는 25일까지 명동예술극장, 2만~5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