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한민국은 순위 공화국] '결정장애'에 빠진 사람들…책도 영화도 1위에 몰려

"영화선정 기준, 관객수·평점"
정보의 홍수 속 안전한 선택

책·음반 1위가 가장 큰 홍보
TV 노출되면 매출 수직상승
그래픽=이정희 기자 ljh9947@hankyung.com
직장인 김수빈 씨(31)는 이번 주말에 볼 영화로 ‘검은 사제들’ ‘007 스펙터’ ‘더 셰프’ 등 최신 개봉작들을 놓고 고심하다 결국 ‘검은 사제들’을 선택했다. 그의 선택 기준은 평소 좋아하는 배우나 감독, 장르가 아니었다. 포털 사이트를 검색해보니 ‘검은 사제들’의 예매율이 1위였다. 관람객 평점이 8.59로 높은 편인 데다 개봉 1주일 만에 누적 관람객 200만명을 돌파했다는 뉴스를 보고 관심이 쏠렸다. 그는 “순위나 평점이 높고 관람 후기가 좋으면 검증된 작품이라는 느낌이 든다”며 “다른 사람은 모두 봤는데 나만 보지 않았을 경우 소외감이 느껴지기도 한다”고 말했다.

자신의 취향보다 남들이 많이 보고 즐기는 ‘대세’를 따라가는 문화소비 현상이 심화하고 있다. 한국경제신문과 시장조사업체 마크로밀엠브레인이 20~50대 성인 남녀 1000명을 대상으로 ‘문화콘텐츠 소비실태’에 대해 설문조사한 결과 응답자 중 44.5%가 ‘누적 관람객 수, 후기 및 평점, 미디어 노출 작품 등 외부 요인을 기준으로 영화를 고른다’고 답했다. ‘자신의 취향에 따라 영화를 선택한다’는 응답 비율(35.4%)보다 높았다.도서와 음원 등 다른 문화상품 선택 기준도 비슷했다. 응답자의 40.65%가 ‘베스트셀러 순위 및 미디어 노출 작품 위주로 책을 산다’고 답했다. 71.4%는 ‘음원을 살 때 음원사이트의 인기순위를 참고한다’고 했다. ‘취향에 따라 산다’는 응답자는 도서 38.05%, 음원 28.6%였다.
13일 서울 교보문고 광화문점을 찾은 한 소비자가 베스트셀러 코너에 진열된 책들을 살펴보고 있다. 김범준 기자 bjk07@hankyung.com
‘결정장애’…가장 손쉬운 기준은 ‘순위’

문화상품을 구매할 때 순위를 고려하는 이유는 뭘까. 응답자들은 ‘검증받은 작품이라는 느낌이 든다’(44%), ‘많은 사람과 콘텐츠에 대해 이야기할 수 있다’(26.9%), ‘최신 트렌드를 따라갈 수 있다’(17.5%), ‘콘텐츠에 대해 알아볼 시간이 부족하다’(11.6%) 등을 꼽았다.전문가들은 ‘순위 추종형 소비’가 심화하고 있는 근본적 요인으로 정보·콘텐츠 과잉시대에 나타나는 ‘결정장애’ 성향을 꼽는다. 날로 불확실해지는 시장 상황과 정보 과부하 속에서 소비자들은 단호하게 결정하지 못하고, 자신이 내린 결정에 대해서도 자신감이 떨어지고 불안해한다는 것. 주부 김진애 씨(43)는 “공연을 자주 보는 편인데, 내가 본 공연이 예매 순위에서 밀려나 있으면 ‘내 취향이 이상한가’란 생각이 먼저 든다”고 말했다.

김난도 서울대 소비자학과 교수는 “새로운 정보가 여기저기 넘쳐나면서 현대인은 쉽게 선택을 하지 못하는 ‘햄릿증후군’을 앓게 됐다”고 설명했다.

끊이지 않는 ‘순위 조작’의 유혹문화평론가 심영섭 씨는 “‘결정장애’를 앓는 현대인이 선택한 가장 손쉬운 결정 지표가 남들의 선택을 볼 수 있는 순위표”라며 “각종 순위표를 생산하는 포털이나 음원사이트 같은 플랫폼에 문화권력이 쏠리게 된다”고 설명했다.

순위표의 영향력이 커짐에 따라 순위를 조작하려는 불법적인 시도가 잇따르고 있다. 음원시장에는 음원사이트의 순위를 올려주는 ‘브로커’까지 등장했다. 최근 신곡을 발표한 가수 이승환 씨는 한 인터뷰에서 “얼마 전 측근을 통해 브로커의 연락을 받은 적이 있다”며 “순위를 올려주겠다면서 억대의 금액을 요구했다”고 털어놨다. 음반 인기순위를 조작하기 위해 중국에서 다량의 스마트폰을 구입해 음원사이트에서 노래를 사재기한 ‘조작 공장’도 최근 적발됐다.

출판계에서도 ‘사재기 논란’이 끊이지 않는다. 지난 5월 한 신생 출판사가 출간한 《내 하루는 늘 너를 우연히 만납니다》의 경우 한 주요 서점에서 두 달간 판매된 도서의 95%를 동일인이 구매한 것으로 드러나 파장을 일으켰다.멜론, 지니, 엠넷 등 음원사이트가 제공하는 ‘실시간 순위’도 최근 음원시장에서 사재기의 주요 표적이 되면서 폐지 논란이 일고 있다. 김민용 경희대 경영대학 교수는 “사재기를 통해 ‘반짝 실시간 1위’를 기록하면 이를 신뢰한 소비자들의 재구매가 이어지고, 계속 순위권 안에 머물 수 있게 돼 가장 손쉬운 ‘홍보 방법’이 된다”고 설명했다.

콘텐츠 제작·유통업계의 치열한 ‘순위 마케팅’ 경쟁이 시장의 다양성과 역동성을 저해하고 있다는 우려도 나온다. 대중문화평론가 정덕현 씨는 “대중은 각종 플랫폼이 제공하는 인기 순위 안에 갇혀 문화를 소비하고 있다”며 “다품종 소량 생산이 필요한 문화콘텐츠 시장에 소품종 대량 생산이 반복되고 있다”고 지적했다.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