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에세이] 나만의 생각과 속도 찾기

끝없이 몰리는 영상에 사색에 잠길 여유 잃어
자신만의 긴 호흡으로 섬세한 감상력 지켜야

박종복 < SC은행장 jongbok.park@sc.com >
최근 TV를 통해 쇼팽 콩쿠르 우승자 조성진 피아니스트의 연주 중계를 봤다. 그의 연주에 푹 빠져 방송을 다 보고 났더니 어느새 두 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TV의 고화질 화면은 조성진의 표정과 제스처, 건반을 누르는 손가락의 움직임을 마치 진짜 무대 위에 있는 것처럼 생생히 전달해줬다. 클래식 음악에 문외한인 필자에겐 그런 영상의 이끌림이 연주에 집중하는 데 많은 도움을 줬다.그런데 만일 화면이 없이 음반이나 라디오 방송 등을 통해 소리로만 연주를 들었다면 어땠을까. 오히려 영상의 영향을 받지 않고 연주의 본질적인 선율을 더 진하게 맛볼 수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요즘 시각적 효과를 주요 수단으로 하는 매체가 빠르게 늘어나고 있다. 인터넷TV와 모바일에선 수천 편의 영화와 드라마가 항상 우리를 기다리고 있다. 또 그림 위주의 슬라이드로 표현하는 이른바 ‘카드 뉴스’도 인기다. 광고와 마케팅 활동도 글자 표현보다 그림 및 영상 전달의 비중이 크게 늘었다. 누군가에게 당장 책과 영상 중에서 선택하라고 한다면 당연히 책보다는 영상 쪽으로 손이 갈 것이다. 영상이 더 받아들이기 쉽기 때문이다.

이런 현상이 계속되면서 생각하는 힘이 약해지는 것 같다. 신문 반 페이지조차도 쉼 없이 정독하는 게 쉽지 않다. 복잡한 문제를 두고 고민할 때 정리하기 어렵고, 생각의 줄기를 놓치기도 한다. 영상의 편안함과 달콤함에 길들여져 그런 게 아닌가 싶다.영상에 익숙해지면 ‘나만의 생각’을 형성하기도 어려워진다. 글을 읽을 땐 자신만의 호흡을 만들어갈 수 있다. 반면 영상은 이미 제작자가 해석해 만든 영상의 속도에 시청자가 따라가야 한다.

모든 것이 접하기 쉽고 편안하게 가공돼 있는 이 시대에 굳이 더디고 불편한 방식을 고집할 이유는 없을 것이다. 그러나 아날로그는 디지털 영상이 담아낼 수 없는 구수함이 있다. 요즘 복고 열풍과 과거 회상 아이템들이 유행하고, 종이 신문도 계속 읽히는 이유가 이 때문 아닐까 싶다. 음악도 귀로만 들었을 때 느낄 수 있는 섬세함과 깊이가 따로 있다.

지하철을 타면 모두 고개를 숙이고 스마트폰을 본다. 스마트폰 대신 책 한 권을 쉬엄쉬엄 읽거나, 눈을 감고 음악을 들으며 사색에 잠겨보는 것도 좋을 것 같다.

박종복 < SC은행장 jongbok.park@sc.com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