점·선·면으로 빛나는 거장 김환기의 뉴욕

한국 추상미술의 선구자 김환기 화백 뉴욕 시절 작품전
현대화랑서 '어디서 무엇이…' 등 점화·추상화 22점 선봬
김환기 화백이 뉴욕 시절 작업한 1972년작 빨간색 점화 ‘Untitled 03-II-72 #220’. 현대화랑 제공
1969년 뉴욕에서 활동하던 김환기 화백(1913~1974)은 친분이 두터웠던 시인 김광섭이 세상을 떠났다는 소식을 접했다. 김 화백은 친구에 대한 그리움과 고국에서의 아련한 추억들을 대형 면포 화면의 푸른 점 하나하나에 새겨 넣었다. 1970년 완성된 이 그림의 제목은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 김광섭의 시 ‘저녁에’의 마지막 구절에서 따왔다. 김 화백은 그해 이 그림을 제1회 한국미술대상전에 출품해 대상을 차지했다. 그는 수상 소감에서 “그리운 친구들을 생각하며 점을 그렸다”고 말했다. 김환기와 김광섭의 우정의 상징인 이 작품은 1970년대 ‘단색화 시대’를 여는 이정표와 같은 대표작이 됐다.

현대화랑을 찾은 관람객이 김환기 화백의 1970년대 작품을 감상하고 있다.
한국 추상화를 탄생시킨 선구자로 평가받는 김 화백의 열정적인 삶과 예술세계를 조명하는 대규모 전시회가 4일부터 내년 1월10일까지 서울 사간동 현대화랑에서 펼쳐진다. 개관 45주년을 맞은 현대화랑의 특별기획전으로, 김 화백이 뉴욕에서 활동한 1963~1974년에 작업한 걸작을 미술관과 소장가들에게서 빌려와 전시를 마련했다.

‘면(面)·선(線)·점(點)’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비롯해 ‘무제’ 시리즈, 황색 점화, 색면 추상화 등 대작 22점이 소개된다. 작가가 뉴욕에서 느낀 자연의 생명력을 비롯해 고국의 산천, 영원성, 향수 등 수많은 의미와 해석을 담아낸 작품들을 볼 수 있는 기회다.

전시장에는 뉴욕의 맑은 밤하늘에 떠 있는 별을 보고 고향을 떠올리며 그린 점화들이 다채로운 색깔로 에너지를 뿜어낸다. 가장 눈길을 끄는 작품은 1973년작 ‘10만개의 점’. 뉴욕 밤하늘의 별과 은하수의 오묘함을 바라보면서 수많은 고국 사람과의 인연을 점으로 묘사했다. 형태를 생략해 초현실적인 미감이 느껴지는 작품이다.올해 초 덕수궁미술관에서 열린 ‘한국근현대회화 100선’전에 출품됐던 1970년작 황색 점화도 다시 만날 수 있다. 노란색과 황색을 겹쳐 색면이 번지는 듯한 효과로 충만함과 무한함을 묘사했다.

세상을 떠나기 한 해 전인 1973년 작업한 점화도 걸린다. 우리 민족적인 화풍을 국제 화단에 알리려는 염원을 바탕에 둔 작품이다. 수많은 푸른 점을 화면에 수놓은 뒤 굵직한 하얀 선을 여러 개 그려넣어 ‘세계를 넘보는 창’을 형상화했다는 게 현대화랑 측의 설명이다. 수만개의 푸른 점과 선들은 수묵화처럼 번지며 빛을 발한다. 점과 선, 면을 즐겨 활용했던 그의 작품에 작게는 한국의 멋, 크게는 동양의 멋이 흐르는 까닭이 여기에 있다.

교통사고 후유증으로 세상을 떠나기 전 병상에서 제작한 잿빛 점화 여러 점도 관람객을 반긴다. 죽음의 그림자를 미리 알아차린 것일까. 김 화백은 허리 통증에도 하루 16시간 이상 작업에 몰두한 것으로 전해진다. 그는 회색빛 점화를 통해 도를 닦는 수도승처럼, 혹은 무심한 마음으로 도자기를 빚는 도공처럼 하늘과 대지의 풍경을 눈부신 회색 점으로 녹여냈다. 1960년대 색면 추상화 ‘밤의 소야곡’ ‘아침의 메아리’ ‘메아리’ 등에서는 음악과 미술의 절묘한 조화를 느낄 수 있다.박명자 현대화랑 회장은 “김 화백은 동양미를 꿰뚫어 보는 안목이 매우 높아 조선시대 목공예품이나 백자의 참맛을 아는 귀한 눈의 소유자였다”며 “서양미술의 경험이 풍부했지만 마지막에는 우리 자연과의 교감을 바탕에 둔 동양적 추상에 도달했다”고 설명했다.

유홍준 명지대 석좌교수는 오는 10일 오후 2시 전시장에서 ‘김환기의 미학 세계’를 주제로 강연한다. (02)2287-3515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