집단적 광기가 부른 비극
입력
수정
지면A36
연극 리뷰 '시련'…28일까지 명동예술극장서한 소녀의 통제되지 않은 욕망이 요동친다. 채워지지 않는 욕망은 사적인 원한으로 자란다. 소녀는 자신에게 상처를 입힌 불륜 상대 존 프락터와 그의 아내 엘리자베스에 대한 복수를 꿈꾼다. 소녀는 원한의 대상에게 악마의 옷을 입힌다. 폐쇄적인 청교도 마을에 사는 사람을 마녀로 몰기 시작한다. 마을 사람들은 살아남기 위해 마녀사냥에 동참하고, 온 마을이 죽음에 대한 극한의 공포에 휩싸인다.
국립극단이 제작해 지난 2일 서울 명동예술극장에서 막을 올린 연극 ‘시련’(아서 밀러 극작, 김윤철 번역, 박정희 연출)은 집단적 광기가 어떻게 무대에서 생생하게 표출될 수 있는지 보여준다. 1692년 청교도 이념이 지배하는 작은 마을에서 일어난 실화가 연극의 배경이다. 아서 밀러는 매카시즘 광풍에 사로잡힌 1950년대 미국의 왜곡된 사회상을 비판하기 위해 이 작품을 썼다.무대는 마을 소녀들의 위험한 장난으로 시작한다. 한밤중 숲속에 모인 소녀들이 춤추는 ‘제의’ 장면은 기괴하면서 초현실적이다. 원작에는 없는, 광기의 무대화다. 극이 진행되는 동안 흰색 속옷 차림의 소녀들은 늘 무대 한편에서 유령처럼 프락터를 지켜본다. 그가 무슨 일을 해도 마녀사냥에서 벗어날 수 없다며 비웃는 듯하다.
극의 핵심 축은 ‘너무나 인간적인 남자’ 프락터의 고뇌다. 성실하고 착한 사람이지만 소녀 아비게일과 불륜을 저지른다. 도덕적 비난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무자비하게 사형을 선고하며 권력의 광기를 보여주는 댄포스 부지사와 소녀 아비게일의 사적인 욕망, 마을 사람들의 잘못된 종교적 믿음은 이 평범한 남자를 선택의 기로에 서게 한다.
권력의 광기를 보여주는 댄포스 부지사 역의 이순재와 끊임없이 갈등하는 프락터 역의 지현준이 강하게 대립하며 극을 이끈다. 뜨거운 몸짓으로 사랑을 표현하다가도 광기 어린 눈빛으로 “모두가 마녀와 함께”를 외치는 아비게일 역의 정운선이 강렬한 인상을 남긴다.연극은 종교의 방패막을 썼지만 본능을 따르는 인간이 얼마나 추악해질 수 있는지 보여준다. 본능을 거부하고 자신의 존엄성을 찾으려는 프락터의 선택이 의미있게 다가오는 이유다. 프락터는 결국 허위 자백서를 찢는다. 다른 누구 때문이 아니라 온전히 자신의 이름을 지키기 위해서다. 28일까지. 2만~5만원.
고재연 기자 ye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