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손보험 악용한 과잉진료] 감기에 '치료 목적' 의사 소견서 붙여 피부미용 주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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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손보험 3천만명 시대…병원 모럴해저드직장인 송모씨는 지난 7월 허리가 아파 서울 종로구에 있는 G신경외과를 찾았다. 가벼운 물리치료를 받기 위해서였다. 병원에 들어서 받아든 문진표에는 실손보험 가입 여부에 ‘예/아니오’로 답하도록 돼 있었다. 송씨가 실손보험에 가입했다고 체크하자, 병원은 1회당 20만원짜리 물리치료를 20회에 걸쳐 제공하는 패키지 마사지 상품을 권유했다. 총 400만원에 달하는 이 패키지에는 아로마 마사지, 찜질 등이 포함돼 있었다. 간호사는 “어차피 보험사에서 치료비가 나오니 마사지 받는 셈치고 패키지 상품을 택하라”고 권했다.
건강보험 적용 안 받는 '고액 처방' 잇따라
"5만원짜리 치료에 10만원 영수증" 홍보도
보험료 급등하고 미가입자는 '의료비 폭탄'
◆보험으로 병원 마케팅실손보험 가입자들이 늘어나면서 비급여 틈새시장을 공략해 잇속을 챙기는 병원들이 늘어나고 있다. 체형교정전문 A병원은 척추 측만증 환자에게 비급여 항목인 도수치료(치료사가 손으로 척추 균형과 위치를 잡아주는 비수술적 치료)를 홍보한 뒤 의료비를 과당 청구했다가 최근 한 보험사에 적발됐다. 이 병원이 지난 3년간 보험사에 청구한 실손보험금을 확인한 결과 비급여 부문이 4억8000만원으로 전체 보험금 지급액의 97%에 달했다. 보험사 관계자는 “이 병원은 홈페이지에 실손보험 상담코너를 별도로 마련해 도수치료를 유도했다”며 “원장은 근골격계 관련 전문자격이 전혀 없는 데도 과잉진료를 일삼았다”고 말했다.
B내과는 감기 기운으로 내과를 찾은 환자에게 1회에 6만~10만원을 받는 일명 아이유 주사(피부미용 주사)와 마늘 주사(피로회복 주사)를 권한다. 단순한 피부 관리는 실손보험 보장 항목에 포함되지 않지만 의사가 ‘치료 목적’이라는 소견서를 붙이면 보험 처리가 가능하다고 설명하는 식이다. C병원은 실제 진료비보다 높은 가격으로 영수증 처리를 해 보험금을 더 받게 해주겠다며 홍보해 환자를 유치하고 있다. 의료업계 관계자는 “5만원짜리 치료를 받아도 10만원짜리 영수증을 끊어주면 그만”이라고 말했다.
◆과잉진료에 부작용 속출돈벌이가 되는 비급여 진료에만 치중하는 병원이 늘면서 각종 부작용도 속출하고 있다. 한 보험사가 올 상반기 실손보험 청구건을 분석한 결과 D이비인후과와 E수면의원 등 2개 병원의 보험 청구가 전체 청구건의 32%, 지급금의 68%를 차지했다. 이들 병원은 코골이 환자에게 수백만원짜리 비급여수술인 이설근전진술, 고주파설근축소술 등을 권유해 수익을 올리고 있는 것으로 확인됐다.
신홍범 코슬립수면의원 원장은 “이설근전진술 등은 턱뼈를 깎거나 혀뿌리를 축소해 수술 후 합병증이 심하고 회복 과정에서 위험한 경우도 있다”고 지적했다. D이비인후과에서 이설근전진술을 받고 부작용을 경험한 환자들은 인터넷 사이트를 통해 피해 사실을 토로하고 있다. 한 환자는 “수술을 받은 뒤 아랫니 5개의 감각이 좋지 않고 수술한 지 3주 만에 다시 코를 곤다”고 호소했다.
최근 백내장 치료 비용이 내려가면서 비급여 항목인 다초점렌즈 삽입술을 권하는 병원도 많아졌다. 때문에 백내장 증세가 없는 경우에도 이 수술을 했다가 부작용을 겪는 환자들도 늘어나고 있다.◆보험 미가입자는 차별
실손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환자들의 부담도 커지고 있다. 병원이 비싼 비급여 진료에만 목을 매면서 실손보험 미가입자도 고비용 진료를 강요받고 있어서다. 실손보험에 가입하지 않은 이새봄 씨(26)는 “병원에서 실손보험이 없다고 하면 돈이 안 된다고 여겨서인지 소홀히 대하는 듯한 느낌을 받는다”며 “경제적 여유가 없어 가입을 미루고 있었는데 무리를 해서라도 보험에 가입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다”고 말했다.
병원들의 실손보험 청구가 적절한지 전문적인 심사 평가를 건강보험심사평가원에 맡기는 방안이 국회에서 논의되고 있다. 하지만 병원들의 반대가 거세다. 공공기관인 심평원이 보험사들의 이익 보전을 위해 동원되는 게 바람직하지 않고, 의사들의 판단 범위를 축소시켜 ‘방어·소극 진료’라는 부작용이 생길 가능성이 크다고 주장한다.보험업계 관계자는 “어떤 식으로든 병원들의 과잉진료를 막지 못하면 결국 국민들의 의료비 부담만 커지게 된다”고 말했다.
이지훈 기자 lizi@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