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규재 칼럼] 새해경제 전망할 때 조심할 점 (1) - 디플레의 축복

"냉장고 꽉차지 않았던 적 없고,
모든 가격은 언제나 하락세였다.
정치우울증, 경제무력감이 문제"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
암울하다. 이대로 가면 경제가 함몰하고 말 것이라는 걱정들이 부딪히는 술잔을 채운다. 경영자총협회는 기업 CEO들의 걱정스런 경영계획이 집계된 보도자료를 돌린다. ‘대기업 경영자의 66.7%가 내년엔 긴축이 불가피하다고 답했다’는 그런 내용이다. 올해의 51.4%에서 껑충 뛴 수치다. 그렇게 공포는 확산된다. 공포는 때로 안도를 부른다. “그러면 그렇지”, “나만 어려울 리야 없지”….

조선 해운 철강 기계 어디 한 군데 멀쩡한 곳이 없다. 전자 자동차를 보는 심정도 까맣게 탄다. 부동산마저 꺼지면 말 그대로 파국이요 종착역이라는 데 생각이 미친다. 대한민국은 결국 여기까지인가 하는 자탄이 스멀스멀 피어오른다. 경제 전망은 정치만큼이나 시계 제로다. 정치는 기어이 초가삼간을 태울 기세다. 그러나 가만히 생각해 보라. 언제 삶이, 경제가, 그리고 사업이 쉬웠던 적 있었나. 언제 장사꾼이 돈 남기면서 물건 판다는 것 봤냐 말이지. 내로라하는 경제 예측 기관 중 GDP나 환율 전망 한 번 제대로 맞힌 곳도 본 적이 없다. 오류가 횡행하지만 그 오류야말로 우리의 희망이다.유행어가 된 소위 ‘디플레’만 해도 그렇다. 언제고 어떤 사업가에게도 파는 가격은 디플레적이었다. 원가압력을 디플레라고 부른다면 사업가는 언제나 인플레 아닌 디플레와 싸워왔다. 원청업체가 쥐어짜지 않았던 적 없었고, 제삿날인듯 월급 주는 날은 언제나 꼬박꼬박 돌아왔다. 논란의 초점인 유가 하락만 해도 그랬다. 한 번씩 저유가 바람이 몰아치면 고유가보다 더한 죽음의 사자들이 찾아왔다. 다만 우리의 지식과 인식의 지평이 짧았던 탓이다. 자원은 고갈돼 본 적이 없건만 시도 때도 없는 자원고갈론만이 너무도 가볍게 촐랑대는 머릿속을 지배해왔다. 40년을 주기로 강단 좌익들과 반(反)시장 세력들의 반복되는 자원 저주가 있었을 뿐이었다.

주부들이 인플레를 푸념하지 않았던 적도 없었다. 냉장고는 김치냉장고를 거쳐 냉동고까지 3종 세트로 구비됐건만 주부들은 냉장고 없던 시절과 식탁물가를 비교하고 있다. 그런 허구의 기억도 없다. 냉장고 3종 세트는 항상 무언가로 꽉꽉 채워져 있다. 냉장고를 열고 썩어 가는 수백 가지 먹거리를 한 번 세어 보시라. 그러나 주부들은 오늘도 물가가 너무 올라 아무 것도 살 것이 없다는 말을 되풀이한다. 인플레적 기억 편향이다.

빈티지도 다양한 포도주를 홀짝이면서, 그리고 임어당이 중국 여성들의 전족한 발에서 풍기는 꼬린 발가락 냄새에 견주었던 치즈를 종류별로 사들이면서, 그리고 함유 성분도 갖가지인 식탁용 소금을 품평하면서 주부들은 디플레를 즐겨왔고 또 그럴 것이다. 식탁에서 디플레가 없었던 적이 있었다면 한번 말해 보시라. 금배추의 기억이라고 해도 금융의 착시였거나 잠깐의 파동이었다. 인플레 편향적 기억은 알고 보면 더 많은 소비에 대한 기대치의 실망 수준이었을 뿐이다.19세기 중반의 밀 가격과 무려 150년이 지난 지금의 시계열 밀 가격을 비교해 보라. 밀 가격이 올랐다면, 다시 말해 인플레였다면 돈 내기를 해도 좋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은 밀을 사기 위해서가 아니라 탄수화물로 출렁거리는 살을 빼기 위해 더 많은 돈을 낸다. 그러니 디플레에 겁먹지 마시라. 인류는 지금처럼 풍요롭게 살아본 적이 없다. 그것은 놀랍게도 디플레의 축복이다. 초가삼간 내 집 장만 문제만 해도 예전에는 평생의 근검절약이 필요했지만 지금은 채 10년이 걸리지 않는다. 집값이야말로 미끄러운 경사면을 흘러내리는 디플레의 상징이다.

경영자들은 환경이나 조건을 탓하지 마라. 환율도 모르면서 키코에 회사 명운을 걸고, 유가 절벽이 오는 줄도 모르고 굴착선을 대량으로 수주했던 CEO들은 당해도 싸다. 시장은 무지를 벌주는 곳이다. 귀가 얇고, 두뇌가 아둔하고, 지식이 모자란 탓이다. 그들은 지난 주말의 경총 조사 결과처럼 언제나 디플레에 겁먹는다. 그런 경제 전망이라면 안 하는 것이 낫다. 정치나 경제나 모두 지력의 고갈이 문제다.

정규재 주필 jk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