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면세점 습격사건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정치가 경제를 망친 경우는 무수히 많지만 5년짜리 시한부 면세점만한 것도 드물 것 같다. 시내면세점 입찰이 한 달 지났지만 후유증은 여전하다. 20여년 공들여 키운 면세점을 빼앗긴 롯데와 SK는 망연자실이다. 이전·확장에 쓴 수천억원을 날리게 됐고 재고 처리도 걱정이다. 연말 문책인사 소문도 흉흉하다. 그런데도 밉보일까 봐 대놓고 반발도 못한다.

승자가 된 두산과 신세계도 샴페인을 터뜨릴 처지가 아니다. 5년 뒤 재심사 때 똑같은 전철을 밟지 말란 법이 없다. 지난 7월 신규 허가를 딴 신라(용산)와 한화(여의도) 면세점이 매장을 다 못 채운 것도 남의 일이 아니다. 명품들은 콧대가 더욱 높아졌다.모두 루저 된 5년짜리 면세점

관세청도 ‘정부가 제 발등에 총을 쐈다’(무디리포트)는 비판에 당혹스런 표정이다. 뒤늦게 제도를 손보겠다지만 사후약방문이다. 최대 피해자는 졸지에 직장을 잃게 된 2200여 면세점 직원들이다. 일자리 창출에 목을 맨 박근혜 정부가 무색해진다.

모두를 루저로 만든 면세점 습격사건이다. 발단은 2012년 홍종학 의원(새정치민주연합)이 발의해 신설한 관세법 176조2항이었다. 결격사유가 없으면 10년마다 갱신되던 면세점 특허가 5년짜리 경쟁입찰로 바뀌었다. 대선을 앞두고 경제민주화 광풍이 불던 차에 갑자기 커진 면세점이 딱 걸렸다. 당시 조세소위 속기록을 보면 경제통이라는 홍 의원이나 새누리당 나성린, 이만우 의원이나 면세점의 글로벌 경쟁력을 고려한 흔적이 없다.이들은 급성장한 면세점의 현재만 봤지, 왜 대기업 중심으로 시장이 재편됐는지는 보지 못했다. 겉보기에 면세점은 백화점처럼 수수료 장사하고 카지노처럼 진입장벽 안에서 떼돈 버는 것 같다. 하지만 막대한 투자비, 상품 구색, 관광객 유치 등 어느 것 하나 쉬운 게 없다. 중소·중견기업은 물론 한진, AK(애경) 등 대기업조차 철수한 이유다.

정치인과 관료들은 움직이는 것을 멈춰 있는 것으로 착각하는 ‘스냅샷의 오류’에 쉽게 빠진다. 시장은 초고속 동영상처럼 변화무쌍한데 정지된 사진으로 보는 것이다. 특정 시점에 경제력 집중, 독과점이 생기면 시장실패로 낙인찍고 개입하려 달려든다. 5년 한시 면세점도 모자라 △면세점 면적의 30% 중소기업 할당 △매출의 5%로 특허수수료 100배 인상 △대기업 진입 제한 등 입법 폭탄이 그런 사례다. 면세점을 중소기업 적합업종쯤으로 여기는 듯하다.

‘입법 망치’가 시장을 파괴한다한국 면세점의 경쟁 상대는 듀프리, DFS 등 공룡들이다. 경제민주화 논리를 들이대면 더 이상 면세점 강국이길 포기해야 한다. 경제민주화의 치명적 오류는 소비자 행동까지 제어 가능하다고 여기는 데 있다. 외국인 관광객들을 좌지우지할 수 있겠나.

한국이 요우커 덕을 볼 날도 얼마 남지 않았다. 중국은 하이난섬에 이어 상하이 베이징에, 일본은 1만8000여개 사후 면세점 외에 도쿄 등지에 각기 한국에서 벤치마킹한 시내면세점을 세울 예정이라고 한다. 황금알이 오리알이 될지도 모른다.

FTA 효과로 관세가 사라지면 사전 면세점(duty free)이 사후 면세점(tax free)과 별 차이가 없어진다. 기준을 충족하면 누구나 진입해 치열하게 경쟁하는 등록제로 전환할 때다. 지금처럼 정부와 국회가 갑질하다간 면세점시장은 공멸한다. 해머(물리적 폭력)보다 더 나쁜 입법 망치(제도적 폭력)로 시장을 부술 건가.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