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멧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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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동양의 판타지 서유기에서 저팔계(猪八戒)가 없었다면 해학과 골계미는 반감될 것이다. 돼지 두상에 단순하고 우직한 낙천가가 저팔계란 캐릭터다. 이름부터가 ‘돼지 저(猪)’자다. 낙천성은 작가적 감정이입의 소산이겠지만, 단순 우직만큼은 돼지의 이미지와 잘 겹친다. ‘저돌적(猪突的)’이란 말을 연상해봐도 그렇다.
돼지를 나타내는 한자는 여럿이다. 돈(豚)자는 돈육, 양돈 등으로 쓰인다. 간지 가운데 을해, 계해년의 해(亥)자는 12지지를 구성하는 돼지다. 60갑자 중 해자가 들어가면 돼지띠다. 시(豕)자는 돼지의 형태를 그린 원시적 상형 문자다. 시심(豕心, 욕심 많고 부끄러움은 없는 돼지 같은 마음), 맹자의 시교수축(豕交獸畜, 사람을 짐승처럼 다루다) 같은 말이 있다.때로는 탐욕과 우직으로, 때로는 풍요와 낙천으로 이미지는 극과 극을 오가기도 하지만 돼지야말로 오랜 가축이다. 수필가 찰스 램이 ‘돼지고기를 논함’에서 인류가 구운 육류를 처음으로 먹은 계기를 저 아득한 고대 중국으로 설정한 것도 그래서 더욱 그럴듯하다. 날고기만 먹던 인류가 돼지우리에서의 실화로 구워져버린 고기를 처음 먹게 된 상황을 묘사한 램의 글도 풍자였다.
음식의 기호에 우열이 있을 리 없지만, 돼지고기가 최고라는 사람들도 많다. 돼지고기 선호는 예부터 중국에서 유별났다. 황제에게 부드러운 돈육을 올리기 위해 수유부의 젖을 먹였다는 기록까지 있다. 식물성, 동물성 가리지 않는 특유의 잡식성 때문에 육질이 좋다고도 한다.
외양은 비슷하지만 멧돼지는 통상적인 집돼지와 다른 과(科)다. 과가 다르면 교배가 안 되지만, 멧돼지와 집돼지는 교배는 된다. 다만 그 새끼들은 2세를 못 낳는다. 호랑이와 사자 사이에 라이거가 나오지만 라이거끼리는 생산이 안 되는 것도 마찬가지다. 산으로 간다고 집돼지가 멧돼지는 안 되겠다.산(메)의 돼지라는 뜻에서 산저(山猪), 야저(野猪)라고도 하는 멧돼지도 독특한 육질 때문에 사육, 판매하는 곳이 많아졌다. 본래 활엽수 우거진 숲속의 초식 동물이었지만 토끼와 들쥐에다 어류와 곤충까지 먹는 잡식성으로 변했다고 한다. 개체수도 늘었다. 서울시내에도 야생 멧돼지 출몰이 잦아 119 출동이 빈번해졌다는 통계가 나왔다. 올 들어 월평균 출동건수가 29.4회라니 2011년의 3.6건에 비해 폭증이다. 농작물 피해도 적지 않은 모양이다. 야생 멧돼지가 다시 늘어난 것도 경제가 발전한 덕일 게다. 땔감나무를 베지 않으니 대도시 주변까지 사방에 우거진 숲이니….
허원순 논설위원 huhws@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