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요인터뷰] 정현호 "10년 내다보고 차세대 보톡스 개발, 세계 1위 기업이 제 발로 찾아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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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오 기업 최초로 '올해의 무역인상' 받은 정현호 메디톡스 대표“일본 출장 길에 한번 만나고 싶습니다.”
보톡스 한우물 집중해 세계 최초로 액상형 개발 성공
기술력은 원조 개발사인 엘러간 뛰어넘어
수출이 매출의 절반, 영업이익률은 60% 이상
우수 인재 바이오 외면…KAIST 졸업생마저 의대행
2012년 9월 정현호 메디톡스 대표에게 한 통의 편지가 왔다. 발신인은 ‘보톡스’로 유명한 글로벌 기업 엘러간의 데이비드 파이요트 최고경영자(CEO)였다. 매출 6조원의 글로벌 기업 수장이 연매출 300억원대에 불과한 한국의 바이오 벤처기업에 친필서한을 보낸 것이다. 서울 강남의 한 호텔에서 마주한 정 대표에게 파이요트 CEO는 파격적인 제안을 내놨다. “전 세계에서 개발 중인 차세대 보톡스 제품 중 당신 회사 것이 가장 나은 것 같다. 우리가 기술을 산 뒤 생산해 제품을 팔고 싶다.”당시 메디톡스는 가루 형태인 보톡스를 액체 형태로 바꾼 차세대 제품을 호주에서 임상시험 중이었다. 정 대표는 “대외비인 임상시험 결과까지 알고 면담을 제안한 정보력에 놀랐다”고 말했다. 1년간의 협상 끝에 2013년 9월 메디톡스는 엘러간과 3억6200만달러(약 3600억원) 규모의 액상형 보톡스 제품 공급계약을 체결했다. 국내 바이오 벤처기업의 해외 수출로는 유례없는 성과다.
정 대표는 보톡스의 원재료인 보툴리눔 독소 기술을 원조 글로벌 기업에 수출한 공로로 산업통상자원부와 한국무역협회, 한국경제신문이 주관하는 ‘2015년 올해의 무역인’ 상을 받았다. 메디톡스의 수출 비중은 올해 매출(약 900억원)의 절반에 육박한다. 영업이익률은 60%대에 달한다. 지난 10일 시상식이 열린 서울 삼성동 그랜드인터컨티넨탈호텔에서 만난 정 대표는 “파이요트 CEO와 처음 미팅한 곳”이라고 설명했다. 그는 “한국의 바이오 기업이 기술력만 갖추면 글로벌 시장에서 충분히 통한다는 것을 보여줘서 더 뜻 깊은 것 같다”고 수상 소감을 밝혔다.
▷바이오 기업 대표로는 처음 올해의 무역인 상을 받았습니다.“메디톡스는 보톡스로 알려진 보툴리눔 독소 제제를 세계에서 네 번째로 상용화한 기업입니다. 보툴리눔 독소는 1g으로 100만명을 사망시킬 수 있을 정도로 맹독물입니다. 1990년대 후반 주름 제거, 사각턱 교정 등 미용에 탁월한 효과가 있다는 것이 입증되면서 관련 시장이 3조원대 규모로 급팽창했습니다. 세계 시장을 공략해야 하는데 원조 회사의 보톡스와 비슷한 제품으로는 승산이 없다고 봤습니다. 10년 전부터 세계 최초의 액상 제품 개발에 주력했습니다.”
▷엘러간 대표의 편지를 받고 놀랐습니까.“엘러간의 한국지사 대표가 연락해 온 적은 있지만 본사에서 직접 만나자고 한 것은 처음이었습니다. 엘러간에서 기술 수출 제안을 받은 뒤에도 내부적으로 논란이 있었습니다. ‘혹시 잠재 경쟁회사 기술을 사들여 사장시키려는 것 아니냐’고 우려하는 연구원도 있었습니다. 협상 1년 동안 엘러간의 진정성을 파악하는 데 주력했습니다. 협상이 깨질 뻔한 적도 여러 번 있었습니다.”
▷해외 직접 진출은 고려하지 않았습니까.
“한국의 바이오 기업이 완제품으로 미국, 유럽 시장을 개척하려면 수십년이 걸립니다. 미국, 유럽에서 모두 임상시험을 해야 하는데 매출 200억~300억원대 회사로서는 자금력에서도 무리였습니다. 제품을 잘 팔 수 있는 기업에 판권을 넘겨 캐시카우를 확보하는 게 더 중요하다고 판단했습니다.”▷수출을 이끈 핵심 기술력은 무엇입니까.
“기존 보툴리눔 독소 제제는 가루 형태로 식염수와 희석해서 사용합니다. 제품의 안전성을 위해 혈액 속 단백질인 알부민이 들어가는데 사람의 혈액에서 채취하는 것이기 때문에 에이즈 등 감염병에 잠재적으로 노출될 가능성이 있습니다. 보툴리눔 독소를 배양하는 물질은 돼지에서 추출한 동물성입니다. 이 때문에 중동 등 이슬람 문화권에서는 전혀 사용할 수 없습니다. 2004년부터 알부민과 동물성 재료를 쓰지 않으면서 액상형인 제품 개발에 나서 2011년께 세계 최초로 성공했습니다.”
▷엘러간은 왜 이런 제품을 직접 개발하지 않았나요.
“엘러간이 보톡스라는 브랜드를 개발한 원조 회사지만 초기 개발에 관여한 개발진은 거의 남아 있지 않습니다. 임상시험 연구인력은 많지만 독소 자체를 생화학적으로 연구하는 팀은 없는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1990년대 중반에 액상형 제제에 대한 기획 아이디어가 나왔는데 사장됐다고 들었습니다.”
▷국내 보톨리눔 독소 연구 1세대인데요.
“1986년 KAIST에서 박사 논문 주제를 고민하던 중 연구실 냉장고에 보관돼 있던 보툴리눔 균체를 주목했습니다. 지도교수였던 양규환 교수가 1970년대 미국에서 가져온 것인데 오랜 기간 연구하는 이가 없어 방치되다시피했습니다. 박사 과정을 마친 뒤 1993년 미국 국립보건원(NIH)으로 연수를 갔는데 세미나에서 보툴리눔 독소가 치료제로 쓰인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습니다. 귀국한 뒤 선문대에서 교수를 맡으면서 보툴리눔 독소 연구를 계속했습니다.”
▷메디톡스를 창업한 계기는 무엇입니까.
“외환위기가 터진 뒤 1998년 정부가 교수들에게 지원하던 연구비가 끊겼습니다. 저처럼 순수과학을 연구하는 교수들은 타격이 컸습니다. 김대중 정부가 교수 창업을 적극 독려했는데 창업 자금의 80%를 정부에서 제공해주는 파격적인 정책이었습니다. 연구비가 필요했기 때문에 사실 궁여지책으로 창업을 해야 했습니다. 그즈음 국내 제약사가 엘러간 보톡스를 수입해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제일 잘 아는 영역이니 자체 개발해 보자고 판단했습니다.”
▷창업하고 첫 제품이 나오기까지 6년이 걸렸습니다.
“자금이 쪼들려 계속 투자받다 보니 지분율이 20%대로 떨어졌습니다. 비용을 줄이려고 값싼 장비를 쓰는 바람에 고생 좀 했죠. 국내에서 처음 개발하는 제품이어서 관련법도 제대로 없어 식품의약품안전처 관계자들과 공부해 가면서 규정을 바꿔 나갔습니다.”
▷정부의 바이오 산업에 대한 이해가 아직 부족하다는 지적이 많습니다.
“엘러간 기술 수출 대금을 받기까지 마음고생이 많았습니다. 2013년 9월 계약 다음날 700억원을 초기 계약금으로 받기로 했는데 정부 승인 때문에 제동이 걸린 겁니다. 해당 기술 개발 과정에서 정부로부터 약 40억원의 지원금을 받았는데 이 때문에 수출계약에 총리 승인이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정부 관계자 앞에서 계약 내용을 설명하는데 ‘국부 유출 아니냐’는 지적도 받았습니다. 계약을 맺고 4개월 만인 2014년 1월에야 총리 승인이 떨어져 대금을 받을 수 있었습니다.”
▷바이오 산업 정책에서 가장 아쉬운 부분은 무엇입니까.
“정부 지원이 꼭 필요한 곳에 지원이 닿지 않는 경우가 많습니다. 기초연구자들에게 일회성이 아니라 지속적으로 지원해야 합니다. 물론 그 돈을 잘못 쓰는 사람도 있을 것입니다. 하지만 잘쓰는 사람이 열 명 중에 한 명만 나와도 국가적으로는 성공하는 것입니다. 손해를 본다고 생각해서도 안 됩니다. ‘지원은 하되 직접 간섭하지 않는다’는 원칙 아래 긴 호흡이 필요합니다. 정권마다 R&D 지원 사업단이 바뀌고 거기에 참여하는 사람들이 헤게모니를 쥐고 줄을 세우려는 폐해가 적지 않습니다.”
▷국내 바이오 기업들은 인력 확보가 어렵다고 호소합니다.
“이공계에 우수한 학생이 많이 가야 합니다. 바이오 벤처기업에도 인재들이 들어와야 성공할 확률이 높아집니다. 하지만 현실은 KAIST 졸업생들조차 의학전문대학원에 가는 상황입니다. 좋은 인재가 대학원에 안 오니 인력의 질도 과거만 못합니다. 후배들에게 한우물을 오래 파라고 권합니다. 고령 인구가 많아지고, 없는 질병도 새롭게 생기고 있습니다. 한 분야의 전문가가 되면 ‘제2의 메디톡스’는 언제든지 가능합니다.”
정현호 메디톡스 대표는…△1962년 광주광역시 출생 △1981년 경기 수원 유신고 졸업 △1986년 서울대 미생물학과 졸업(82학번) △1988년 KAIST 세포생물학 석사 △1992년 KAIST 분자생물학 박사 △1993년 미국 국립보건원(NIH) 객원연구원 △1995년 선문대 미생물학과 교수 △2000년 메디톡스 창업 △2011년 1000만불 수출의탑 수상 △2014년 ‘올해의 바이오 R&D 우수기업’ 산업통상자원부 장관 표창 △2015년 2000만불 수출의탑 및 특수유공 분야 기술개발 부문 대통령 표창 △2015년 한국을 빛낸 올해의 무역인 상 수상
조미현/김형호 기자 mwise@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