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디슨·휴맥스·주성엔지니어링 이후…'스타 제조벤처' 20년 실종사건

소프트웨어 업종만 몰려…창업 빈자리 중국 기업이 선점

매출 1000억원 이상…'스타 벤처' 후보 3년간 제자리
“제조업 창업하겠다는 사람은 찾기도 힘들어요. 제조업 하면 돈도 모으기 힘들고요.”

서울 양재동 엘타워에서 15일 열린 벤처기업협회 신년인사회에서 만난 황철주 주성엔지니어링 회장의 말이다. 그는 반도체 장비로 한때 매출 4000억원을 올린 1세대 벤처스타 중 한 명이다. 그의 말대로였다. 이날 행사의 주역은 1980년대 메디슨(현 삼성메디슨)을 창업한 이민화 KAIST 교수, 장흥순 전 터보테크 사장 등이었다. 벤처기업협회 회장인 정준 쏠리드 사장, 지문 인식 국내 1위 업체 크루셜텍의 안건준 사장 등 ‘2세대’ 벤처기업인은 젊은 축에 속했다. 1세대 벤처스타 변대규 휴맥스 회장도 1989년에 창업했다. 20년 넘은 기업들이다.이후 제조업에 뛰어들어 이름을 날린 기업인은 찾아보기 어려웠다. 스타벤처로 거론되던 모뉴엘의 성장은 사기였음이 드러났고, 스팀청소기 회사 한경희생활과학은 매출 1000억원을 정점으로 성장이 꺾였다. 이춘우 서울시립대 교수는 “2000년대 초 정보기술(IT) 거품이 꺼진 뒤 벤처를 기피하는 ‘벤처 빙하기’가 찾아왔다. 이 기간에 대기업 출신 우수 인재들이 창업전선을 떠났다”고 원인을 진단했다. 이 자리는 중국 기업들이 차지했다. 샤오미 등은 스피커, 배터리, 체중계, 드론 등 국내 중소기업이 도전할 만한 영역을 선점했다.

제조업 전망도 어둡다. 젊은 창업가들이 게임, 앱(응용프로그램) 등 소프트웨어 쪽으로 몰리고 있기 때문이다. 벤처 인증을 받은 기업 중 제조업 비중은 2011년 74.2%에서 지난해 70.3%로 낮아졌다. 반면 정보처리 소프트웨어 업종은 같은 기간 13.9%에서 16.5%로 높아졌다.

최근 벤처기업협회 내에는 ‘30대 벤처 모임’이 결성됐다. 벤처기업협회 내 ‘고령화 문제’를 해소하기 위해 젊은 벤처기업들이 모인 것이다. 재생에너지 사업을 하는 에스엔에스에너지의 김찬호 대표, 3차원(3D) 프린터 사업을 하는 포머스팜의 윤정록 대표 등이 주요 멤버다. 김찬호 대표는 “창업 트렌드에 휘둘리지 않고 독자적인 기술력을 확보한 기업들끼리 뭉쳐 시너지 효과를 내는 게 목표”라고 말했다. 협업을 통해 성장하겠다는 것이다. 급성장한 제조업 벤처기업이 없는 문제를 스스로 인식하기 시작한 것이다.1998년 한글과컴퓨터 사장을 지낸 전하진 새누리당 의원은 “조선, 철강, 화학 등 기존에 대기업들이 탄탄하게 받쳐줬던 산업이 줄줄이 무너지고 있는 상황에서 혁신적인 벤처기업들이 이 틈을 메워줘야 한다”고 진단했다. 하지만 그는 “우리 사회는 인식조차 제대로 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다”고 덧붙였다.

어두운 전망을 뒷받침하는 수치는 계속 나오고 있다. ‘스타 벤처기업’ 후보로 꼽히는 ‘매출 1000억원 이상 벤처기업’ 숫자는 450~460개 선에서 3년간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제조업 법인 신설도 줄고 있다. 작년 11월까지 제조업 분야 신설법인은 1만8334곳으로 전년 동기 대비 6%가량 감소했다. 전체 신설법인에서 차지하는 비중도 23%에서 21.5%로 1.5%포인트 줄었다.

전문가들은 한국에서 제조업의 위상을 감안했을 때 스타기업 기근현상은 한국 경제의 심각한 문제라고 지적했다. 1990년대 중반 510만명에 이르던 제조업 고용은 2010년 380만명까지 줄었다. 서비스업 생산성이 낮은 상태에서 제조업 일자리 감소는 이 기간 양극화와 청년실업 등 심각한 사회문제의 원인이 됐기 때문이다.이와 관련, 한정화 중소기업청장은 “정부가 지원하는 월드클래스300 기업처럼 글로벌 경쟁력을 갖춘 중견기업이 3000개만 되면 고용과 성장문제를 동시에 해결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안재광/이현동 기자 ahnj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