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찰팀 리포트] 불륜 포착에서 산업스파이 조사까지…흥신소의 진화
입력
수정
지면A26
갈수록 커지는 민간조사 시장지난 28일 오전 7시 경기 남양주시의 한 아파트. “흰색 싼타페가 아마 여기쯤 있을 텐데….” 5분째 차량의 핸들을 부지런히 돌리며 지하주차장을 살피던 최모 팀장(36)이 나직이 한숨을 쉬었다. 흔히 흥신소로 불리는 민간조사(사설탐정) 일을 10년째 해온 최 팀장이지만 목표물인 김모씨의 차량이 보이지 않자 신경이 바짝 곤두섰다. 마침내 김씨의 차량을 발견한 최 팀장은 조수석 뒤편 좌석으로 몸을 옮기더니 캠코더를 꺼내들었다. “놓치는 한이 있어도 노출되면 끝장이기 때문에 이렇게 뒤쪽에서 찍죠.” 이윽고 등장한 김씨가 자신의 차량에 탑승하는 모습이 고스란히 캠코더에 담겼다. 김씨의 차가 주차장을 빠져나가자 최 팀장도 간격을 두고 따라붙기 시작했다. 도로에선 의심을 피하기 위해 가급적 중간에 다른 차량 한두 대를 사이에 끼고 쫓아갔다.
과거 가정사건 위주로 담당…최근엔 지식재산권 사건 늘어
"시장 확대로 미국·일본 업체도 활동…간통죄 폐지 후 남성 의뢰 20%↑"
민간조사업의 활동영역이 갈수록 넓어지고 있다. 전통적인 흥신소 업무는 배우자의 외도 정황 포착 등 주로 가정사건 위주였다. 하지만 최근엔 각종 법적 분쟁에 필요한 증거 수집은 물론 기업 간 기술유출, 산업스파이 등 지식재산권 관련 사건으로 확대되는 추세다. 미국과 일본 등 해외 업체들도 속속 한국 시장에 진입하고 있다.경쟁사 기술유출 직원 찾아내
최 팀장은 기업 간 기술유출 사건 조사를 위해 김씨를 추격했다. 바이오기업인 K사에서 10년간 연구원으로 일한 김씨는 작년 9월 개인 사정을 이유로 갑자기 회사에 퇴사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K사는 5년간 동종업체에 이직하지 않는다는 조건으로 김씨의 퇴사를 수용했다. 그런데 두 달 뒤부터 K사에 위기가 찾아오기 시작했다. 그간 K사 제품을 구매해온 국내외 주요 거래처가 경쟁사인 S사로 옮겨간 것이다. 해당 제품은 이전까지 K사만 생산해왔다. 김씨가 몰래 S사로 이직해 핵심기술을 유출했다고 판단한 K사는 곧 김씨에 대한 법정 소송 준비에 들어갔다.최 팀장은 김씨가 S사로 이직했다는 증거를 확보해달라는 K사의 의뢰를 받았다. 김씨가 남양주 아파트를 나와 40여분을 달려 도착한 곳은 경기 판교의 한 사무용 빌딩. S사가 입주해 있는 곳이다. 빌딩의 A동 주차장에 차를 세운 김씨가 B동 입구를 향해 걷자 최 팀장은 재빨리 캠코더를 꺼내 그가 들어가는 모습을 촬영했다. “김씨가 뭐가 켕기는 게 있는지 회사 사무실이 있는 B동이 아닌 A동에 꼭 차를 세우더라고요. 승강기를 타고도 굳이 11층에서 내려 사무실(13층)까지 계단으로 걸어 올라갑니다.”
시장 성장에 해외 업체도 들어와
지난 27일 오후 서울 강남의 한 민간조사업체 ‘웬즈코리아’의 사무실. 김형민 실장(42)은 기자와 대화하는 와중에도 쉴 새 없이 전국 각지의 현장에 파견된 조사원에게 전화로 지시를 내리고 의뢰인들과 통화했다. 계속되는 전화에 1분 이상 대화를 이어나가기 쉽지 않았다. 김 실장은 “불륜 등 가정사건 비율이 아직 절반 이상이지만 해외 기술유출 조사 등 기업 관련 사건 비중이 점점 높아지고 있다”고 전했다. 이 업체는 해외 사건 조사를 위한 전담팀을 두고 미국 일본 등 현지 업체 3곳과 협력체계를 마련했다.최근 민간조사업계에선 스마트폰의 대중화로 동영상 촬영이 쉬워져 사생활 유출 조사 의뢰가 크게 늘었다. 한 업체 관계자는 “성관계 동영상 유포 사건은 경찰 고소로는 해결에 시간이 걸린다”며 “신속하면서도 은밀히 사건을 처리하고 싶은 연예인 등 유명인의 의뢰가 많다”고 귀띔했다.
이처럼 시장이 확대되면서 해외 업체들의 한국 진출도 늘고 있다. 유우종 한국민간조사협회 회장은 “이미 컨설팅업체 간판을 달고 영업 중인 곳들까지 포함하면 한국 시장에 진출한 해외 업체는 수십여개에 달할 것”이라고 설명했다.
김 실장은 “최근 한 미국계 회사는 전국 지점 모집에 나섰고 일본계 회사는 상담원을 대거 모집 중”이라고 전했다. 이들 외국 업체는 100년 넘게 축적한 노하우로 무장해 음성적이고 영세화된 국내 업체들보다 우위에 있다는 평이다.지난해 2월 헌법재판소의 위헌 결정으로 간통죄가 폐지됐지만 불륜 조사 수요에는 별다른 영향이 없다는 게 업계 관계자들의 분석이다. 법적 근거가 사라져 경찰의 개입이 불가능해지면서 민간조사업체에 대한 의존도는 더 높아졌다는 의견도 있다. “간통죄 폐지로 과감히 외도를 시도하는 여성이 늘어나면서 남성 의뢰인 비율이 예전보다 10~20% 높아졌다”는 이야기도 들린다.
오형주 기자 ohj@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