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칼럼] 몬다비 가문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1976년 5월 프랑스 파리에서 와인 시음대회가 열렸다. 캘리포니아 와인에 반한 영국인 와인숍 운영자 스티븐 스퍼리어가 주도했다. 심사위원단이 눈을 가리고 블라인드 테이스팅한 결과는 이변이었다. 캘리포니아 와인이 쟁쟁한 프랑스 와인들을 누르고 1위에 오른 것이다. 이른바 ‘파리의 심판’이다. 이 사건은 2008년 ‘와인 미라클’이란 영화로도 만들어졌다.

프랑스 측은 숙성이 덜 된 와인을 비교했다며 평가절하했다. 그러나 캘리포니아 와인의 화려한 데뷔를 알리는 신호탄이었다. 절치부심하던 프랑스 와인업계가 2006년 재대결을 제안했다. 이번엔 캘리포니아 와인이 1~5위를 휩쓸었다.미국 와인의 대명사인 캘리포니아 와인의 출발은 흥미롭게도 골드러시였다. 1850년대 금광 발견에 실패한 유럽 이민자들은 캘리포니아가 기후, 토양 등 와인 생산에 천혜의 입지임을 간파한 것이다. 지금은 1100㎞에 걸쳐 1200여개 와이너리가 들어서 미국 와인의 90%를 생산하고 있다.

그러나 우여곡절도 많았다. 1880년대 세계를 휩쓴 포도나무 피록세라(뿌리 진디), 1920년대 금주법 탓에 고사 직전까지 갔다. 미국 와인이 부활한 것은 1960년대 들어서다. 이탈리아에서 이민 와 나파밸리에 자리잡은 몬다비 가문, 소노마밸리의 갤로 가문 등이 그 주역이다. 나파(Napa)는 인디언 말로 ‘많다, 풍요롭다’는 뜻이다. 나파밸리의 와인 생산량은 캘리포니아 전체의 4%에 불과하지만 미국 와인의 대명사나 마찬가지다.

1943년 나파밸리의 찰스 크러그 와이너리를 인수한 체사레 몬다비의 두 아들 로버트와 피터는 미국인의 입맛을 싸구려 벌크와인에서 고급 와인으로 바꿔놨다. 부친 작고 후 형제간 이견으로 로버트는 1965년 독립했다. 로버트 몬다비가 포도품종을 라벨에 표시하고 새로운 포도 재배방식을 도입하면 모두 미국 와인의 표준이 됐다. 그의 ‘오퍼스 원’은 이름 그대로 미국 와인의 ‘작품번호 1번’이다.동생 피터는 부친이 일군 몬다비 와인의 명맥을 이었다. 형제는 40년 만인 2005년 화해하고 공동으로 와인을 내놓기도 했다. 그러나 2008년 로버트가 95세로, 지난 주말엔 피터가 101세로 타계했다. 신대륙 와인이 결코 구대륙에 뒤지지 않는다는 점을 입증한 몬다비 형제다.

유럽 와인이 빈티지나 테루아를 엄격히 따지지만 미국 호주 칠레 등 신대륙 와인은 굳이 그럴 필요가 별로 없다. 오늘날 와인은 세계적으로 점차 표준화돼 가는 양상이다. 와인 선택기준은 명성이 아니라 자신의 입맛이면 충분하다. 가격까지 착하면 금상첨화일 테고….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