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패스파인더가 필요한 때다

오춘호 논설위원·공학 박사 ohchoon@hankyung.com
휴맥스는 1989년 설립된 디지털 셋톱박스 생산 기업이다. 벤처 1세대치고는 드물게 제조업 회사다. 지난해 매출이 1조4900억원 규모로 대기업 범주에 들어간다. 방송용 셋톱박스 생산 기술에선 세계에서 독보적이다. 그보다 글로벌 시장 영업에 대한 노하우가 더 큰 핵심 역량이다. 지금도 세계 30여개 국가에 글로벌 영업망을 갖추고 있다. 회사 성장 과정에서 온갖 어려움이 있었다. 투자자들은 사업 다각화를 줄기차게 요구했다. 휴대폰이나 디지털 TV와 같은 영역에도 도전해봤다. 이보다 더 힘들었던 것은 세계 시장에 대한 도전이었다. 글로벌 영업에 자신을 가졌지만 현실은 녹록지 않았다.

수많은 실패가 기업의 핵심역량인도나 이탈리아에서 현지법인을 설립해 뛰었지만 재미를 보지 못했다. 하지만 이런 수많은 시행착오가 오늘날 휴맥스를 있게 했다.

한미약품 또한 당뇨 신약이 5조원에 프랑스 사노피에 수출될 만큼 확실한 핵심 역량을 보유한 기업이다. 이 기술을 개발하는 데 무려 13년이 걸렸다고 한다. 휴맥스나 한미약품 모두 진득하게 본업을 지키고 매년 수업료를 낸 게 핵심 역량 기업으로 자리 잡은 배경이다.

기업이 핵심 역량을 쌓는다는 것은 지난한 과정임에 틀림없다. 수많은 실패를 거듭한 뒤에야 비로소 얻는 것이다. 현대자동차의 알파엔진이나 삼성의 D램 반도체도 끝없는 시련과 도전의 결과물이다. 이정동 서울대 교수는 《축적의 시간》에서 핵심 역량은 시행착오의 비용과 맞먹는다고도 했다. 하지만 실패의 경험을 제대로 축적하지 못한 한국 기업들은 핵심 역량을 갖추지 못해 성장 정체 현상을 빚고 있다. 한국 기업들이 더 이상 추격형 전략에서 머무를 수 없고 선도형으로 질적 전환을 해야 한다는 데 이론의 여지가 없다.남이 가보지 않은 길을 찾아야

새로운 경로를 발견해내고 개척하는 패스파인더(pathfinder)가 되지 않으면 세계 시장에서 살아남기 힘든 것이 현실이다. 그러나 국내에서 패스파인더 기업을 찾는다는 것은 ‘하늘의 별 따기’다. 대부분 기업은 패스파인더가 되길 두려워한다. 제품에 대한 믿음도 없고 기술에 대한 확신도 없다. 더구나 글로벌 시장에서 영업망을 확보하고 시장을 개척해 나간다는 것도 망설인다. 핵심 역량에 대한 자신감이 부족한 탓이다.

하지만 시장은 기다려주지 않는다. 이미 안항(雁行)경영이나 수직계열화, 동북아분업 등 한때 한국 경제에 먹혔던 화두들은 철 지난 지 오래다. 제품이나 산업이 디지털화할수록 제품의 수명주기는 더욱 짧아진다. 시장 생태계는 기술과 시장의 빠른 변신만 요구한다. 업종 간 경계도 쉽게 허물어 버린다. 사물인터넷(IoT) 시대는 더욱 그럴 전망이다. 웬만한 핵심 역량을 갖추지 않으면 그저 도태할 수밖에 없는 구조다.한국 기업들은 그동안 시장에 맞게 적응하고 진화해왔다. 핵심 역량이 없어도 모방학습 등을 통해 성장했다. ‘선택과 집중’이냐 ‘다각화’냐 하는 것도, ‘전문인 경영’과 ‘오너 경영’의 논란도 결국 시장의 압력이 만든 것이었다. 하지만 이제는 다르다. 우리가 바라는 롤모델은 이제 외국에서 찾을 수 없다. 우리의 DNA에서 끄집어 낼 수밖에 없다. 정주영 현대 명예회장이나 이건희 삼성 회장과 같은 기업가 정신의 재발견이 필요한 이유다.

오춘호 논설위원·공학 박사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