당신도 이세돌처럼 져라 … 외로웠던 천재의 절망과 도전
입력
수정
이세돌 9단이 외로웠던 싸움을 끝냈다. 아무리 떠들썩해도 결국 혼자만의 싸움이었다.
이 9단은 15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제5국에서 알파고와 대혈투 끝에 돌을 던졌다. 280수 만에 불계패를 선언한 뒤엔 이마에 손을 얹고 한동안 바둑판을 응시했다.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승부사의 아쉬움 가득한 표정이었다.이날 알파고는 막판 좌하귀 바꿔치기로 팽팽하던 승부를 역전시켰다. 이 9단은 한 집 반 가량 벌어진 차이를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1200개의 머리’를 가진 알파고의 계산을 넘지 못했다.○‘도전 받은 자’에서 ‘도전자’로
‘세기의 대결’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이 9단의 압승이 예상됐다. 이 9단 또한 5 대 0이나 4 대 1이 될 것으로 낙관했다. 지난달 22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기자회견 당시 그는 알파고의 기력을 3단으로 봤다. .막상 뚜껑을 여니 상황이 달라졌다. 이 9단은 9일부터 12일까지 열린 1, 2, 3국을 내리 내줬다. ‘세기의 대결’은 싱겁게 승자가 결정됐다. 남은 건 ‘충격’이었다.
누구보다 당혹스러운 사람은 ‘인류 대표’로 나선 이 9단. 1국에선 알파고를 얕보고 ‘테스트’를 하려다 의표를 찔렸지만 2, 3국은 전력을 다하고도 졌다. 특히 이 9단의 기풍대로 가장 저돌적이었던 3국에서 종반 하변 전투는 처절함까지 묻어 나왔다. 사실상 승부가 기운 상황이었지만 이 9단이 얼마나 이기고 싶었는지 엿볼 수 있었다.
이 9단의 3연패에 뒤엔 설왕설래가 이어졌다.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알파고의 상대로 이세돌이 적절하지 않다’며 자격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WSJ는 중국 1위 커제 9단이 알파고의 상대가 되어야 한다고 언급했고, 커제 9단은 이 9단과의 상대 전적을 소개하며 이를 두둔했다.
국내에서는 정보 비대칭으로 이 9단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기원이 구글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패싸움을 하지 않기로 사전 협의가 있었다’거나 ‘지금이라도 비참한 싸움을 그만둬야 한다’는 말도 나돌았다.○“이세돌 개인의 패배”이 9단은 조롱과 비난을 피하지 않았다. 22년을 쌓아 온 신화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재는 승복했다. ‘변명’과 ‘회피’ 대신 ‘도전’을 택했다.
이 9단은 12일 3연패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인간이 아닌 이세돌의 패배”라며 오히려 인류를 위로했다.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사과도 이어졌다.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였지만 자존심을 버리고 ‘완패’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정보 비대칭 문제에 대해선 “내 실력이 모자랐을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고도 박수를 받은 이유다.
그는 또 “승패에 대한 부담을 덜었으니 남은 대국에서 한 판이라도 이기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9단은 결국 4국에서 자신의 말을 지켰다. 기어이 알파고의 약점을 찾아내 인류에게 승리를 선물했다. ‘학습하는 인공지능’에게 인간 또한 학습과 적응의 동물임을 각인시켰다.
한 번의 대국이 더 남아 있었지만 이 9단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알파고가 흑을 잡으면 어려워하는 것 같으니 내가 흑을 잡겠다” 며 “흑으로도 이겨보고 싶다”고 다시 도전했다. 이겼던 방법대로 7.5집의 덤을 안고 실리를 챙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더라도 가치 있는 싸움을 선택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택한 조건의 5국에서 졌다. 누구도 이 9단의 패배라 느끼지 못할 만큼 장렬히 졌다. 오히려 개발자들도 몰랐을 알파고의 한계를 이끌어냈다. 이 9단의 집념이 알파고에 입력된 16만 개의 기보엔 없었기 때문이다.지상파 3사를 포함해 14개의 채널이 이 9단의 마지막 도전을 중계했다. 바둑의 ‘바’ 자도 모르던 시민들은 이 9단의 고뇌를 지켜보며 응원했다. 그리고 최고의 실력을 지닌 기사가 최선을 다해 지는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패배였다. 한 누리꾼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내게 쓰라린 패배의 순간이 올 텐데, 그때 내가 이세돌처럼 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경의를 표했다.조치훈 9단은 오래전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라며 바둑의 승패가 세상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다만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바둑을 둘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말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둑으로 세상이 뒤흔들렸다. 이 9단은 단지 자신의 바둑을 뒀을 뿐이었다.
전형진 한경닷컴 기자 withmold@hankyung.com
이 9단은 15일 서울 종로구 포시즌스 호텔에서 열린 구글 ‘딥마인드 챌린지 매치’ 5번기 제5국에서 알파고와 대혈투 끝에 돌을 던졌다. 280수 만에 불계패를 선언한 뒤엔 이마에 손을 얹고 한동안 바둑판을 응시했다. 모든 것을 쏟아 부은 승부사의 아쉬움 가득한 표정이었다.이날 알파고는 막판 좌하귀 바꿔치기로 팽팽하던 승부를 역전시켰다. 이 9단은 한 집 반 가량 벌어진 차이를 따라잡기 위해 최선을 다했다. 하지만 ‘1200개의 머리’를 가진 알파고의 계산을 넘지 못했다.○‘도전 받은 자’에서 ‘도전자’로
‘세기의 대결’이 시작되기 전까지는 이 9단의 압승이 예상됐다. 이 9단 또한 5 대 0이나 4 대 1이 될 것으로 낙관했다. 지난달 22일 한국기원에서 열린 기자회견 당시 그는 알파고의 기력을 3단으로 봤다. .막상 뚜껑을 여니 상황이 달라졌다. 이 9단은 9일부터 12일까지 열린 1, 2, 3국을 내리 내줬다. ‘세기의 대결’은 싱겁게 승자가 결정됐다. 남은 건 ‘충격’이었다.
누구보다 당혹스러운 사람은 ‘인류 대표’로 나선 이 9단. 1국에선 알파고를 얕보고 ‘테스트’를 하려다 의표를 찔렸지만 2, 3국은 전력을 다하고도 졌다. 특히 이 9단의 기풍대로 가장 저돌적이었던 3국에서 종반 하변 전투는 처절함까지 묻어 나왔다. 사실상 승부가 기운 상황이었지만 이 9단이 얼마나 이기고 싶었는지 엿볼 수 있었다.
이 9단의 3연패에 뒤엔 설왕설래가 이어졌다.월스트리트저널(WSJ)은 ‘알파고의 상대로 이세돌이 적절하지 않다’며 자격에 대한 의문을 제기했다. WSJ는 중국 1위 커제 9단이 알파고의 상대가 되어야 한다고 언급했고, 커제 9단은 이 9단과의 상대 전적을 소개하며 이를 두둔했다.
국내에서는 정보 비대칭으로 이 9단이 불리할 수밖에 없었다는 지적이 나왔다. 한국기원이 구글에 이의를 제기할 것이란 관측도 나왔다. ‘패싸움을 하지 않기로 사전 협의가 있었다’거나 ‘지금이라도 비참한 싸움을 그만둬야 한다’는 말도 나돌았다.○“이세돌 개인의 패배”이 9단은 조롱과 비난을 피하지 않았다. 22년을 쌓아 온 신화가 무너지고 있었다. 그러나 천재는 승복했다. ‘변명’과 ‘회피’ 대신 ‘도전’을 택했다.
이 9단은 12일 3연패 후 가진 기자회견에서 “인간이 아닌 이세돌의 패배”라며 오히려 인류를 위로했다. 자신의 무력함에 대한 사과도 이어졌다. 지는 것을 죽기보다 싫어하는 그였지만 자존심을 버리고 ‘완패’라는 말도 서슴지 않았다. 정보 비대칭 문제에 대해선 “내 실력이 모자랐을 뿐”이라며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지고도 박수를 받은 이유다.
그는 또 “승패에 대한 부담을 덜었으니 남은 대국에서 한 판이라도 이기도록 노력하겠다”고 다짐했다.
이 9단은 결국 4국에서 자신의 말을 지켰다. 기어이 알파고의 약점을 찾아내 인류에게 승리를 선물했다. ‘학습하는 인공지능’에게 인간 또한 학습과 적응의 동물임을 각인시켰다.
한 번의 대국이 더 남아 있었지만 이 9단은 쉬운 길을 택하지 않았다. 그는 “알파고가 흑을 잡으면 어려워하는 것 같으니 내가 흑을 잡겠다” 며 “흑으로도 이겨보고 싶다”고 다시 도전했다. 이겼던 방법대로 7.5집의 덤을 안고 실리를 챙기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그는 지더라도 가치 있는 싸움을 선택했다.
그리고 결국 자신이 택한 조건의 5국에서 졌다. 누구도 이 9단의 패배라 느끼지 못할 만큼 장렬히 졌다. 오히려 개발자들도 몰랐을 알파고의 한계를 이끌어냈다. 이 9단의 집념이 알파고에 입력된 16만 개의 기보엔 없었기 때문이다.지상파 3사를 포함해 14개의 채널이 이 9단의 마지막 도전을 중계했다. 바둑의 ‘바’ 자도 모르던 시민들은 이 9단의 고뇌를 지켜보며 응원했다. 그리고 최고의 실력을 지닌 기사가 최선을 다해 지는 모습에 박수를 보냈다.
아름답고 낭만적인 패배였다. 한 누리꾼은 “아무리 열심히 살아도 인생의 어느 지점에서 내게 쓰라린 패배의 순간이 올 텐데, 그때 내가 이세돌처럼 질 수 있었으면 좋겠다”고 경의를 표했다.조치훈 9단은 오래전 “그래 봤자 바둑, 그래도 바둑”이라며 바둑의 승패가 세상엔 아무런 영향을 주지 못한다고 말했다. 다만 자신이 가장 잘할 수 있는 바둑을 둘 뿐이라는 것이다. 그러나 이제 이 말은 다시 생각해 볼 필요가 있다. 바둑으로 세상이 뒤흔들렸다. 이 9단은 단지 자신의 바둑을 뒀을 뿐이었다.
전형진 한경닷컴 기자 withmold@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