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人사이드 人터뷰] 국립현대미술관 첫 외국인 관장,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

"화랑 심부름꾼에서 미술관장으로…취미로 시작한 게 직업이 됐죠
미술관은 결과를 보여주는 곳…한국에 '최고의 전시'로 보답할 것

밑바닥부터 시작한 30년 '미술인생'…새로운 시작 위해 한국에 왔죠
동아시아 미술은 잠재력 가장 커…세계적인 미술관으로 성장시킬 것"
지난해 12월 국내 미술계의 이목이 한 사람에게 쏠렸다. 국립현대미술관 신임 관장으로 뽑힌 스페인 출신 전시기획자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50)였다. 1년2개월 넘게 수장 자리를 비워놨던 국립현대미술관은 국공립 문화예술기관 중 처음으로 외국인 최고경영자(CEO)를 맞았다.

반응은 극명히 엇갈렸다. 일부는 마리 관장이 2013년부터 국제현대미술관위원회(CIMAM) 회장을 맡고 있는 세계적 전문가라는 점에 기대를 걸었다. 한국 미술의 파벌 논란에서 자유로운 ‘미술계의 히딩크’라는 얘기도 나왔다. 반면 한국 문화와 한국 미술계를 잘 모르는 사람이라는 우려도 적지 않았다.취임 3개월을 막 넘긴 지난 16일 서울 소격동 국립현대미술관 서울관에서 마리 관장을 만났다. ‘영어나 스페인어로 인사를 해야 하나….’ 잠시 멈칫거리는 사이 그가 먼저 “안녕하세요”라며 허리를 숙였다. 스페인어로 “무초 구스토(Mucho gusto)”라고 반갑다는 인사를 건네자 “캄사합니다”란 대답이 돌아왔다. 한국에서 지내는 게 어떤지 묻자 “아직 알아보고 싶은 것이 너무나 많다”며 눈을 반짝였다. 그는 “한국말을 열심히 배우고 있다”고 했다. 인터뷰는 영어로 했다.

“주중에는 주로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과 서울관을 오가며 일을 봅니다. 전시 기획부터 조직 구성까지 하루에 6~10차례 회의가 있어요. 주말에는 주로 예술가들을 만나고, 다른 전시관과 화랑을 돌아봅니다. 국립중앙박물관에서 옛 유물을 한참 보고 오기도 하죠.”

운명처럼 시작한 큐레이터로서의 삶그는 자신을 ‘밑바닥에서부터 올라온 관장’이라고 소개했다. 개인 화랑의 잡부로 시작해 미술관장, 세계적인 국제미술기구 회장까지 올랐다. 젊은 시절엔 꿈도 꾸지 않은 자리다. 스페인 바르셀로나대에 다닐 때도 미술계에서 일할 것이라고 생각한 적은 없단다. 철학을 전공했고 현대문학을 좋아했다. 우연히 지인의 부탁을 받고 화랑 일을 하면서 미술과 인연을 맺었다.

“이 일이 평생의 업이 될지 몰랐습니다. 독일인 예술비평가가 바르셀로나에 개인 화랑을 여는데 좀 도와 달라더군요. 전시 기획은 화랑 주인의 몫이었고, 저는 온갖 지원 업무를 봤습니다. 당시 영어를 못했는데 일하면서 배웠어요.”

화랑은 석 달 만에 문을 닫았지만 미술에 대한 그의 관심은 이어졌다. 비평 글을 꾸준히 쓰다가 1989년 벨기에 브뤼셀로 건너갔다. 당시 집세와 생활비가 싸서 유럽 예술가가 많이 모여들었다. 그곳에서 브뤼셀 현대건축박물관의 큐레이터로 취직했다.“사실 큐레이터가 뭘 하는지 모른 채 일을 시작했어요. 삶이 빠르게 바뀌어 갔지만 혼란스럽지는 않았습니다. 직업이라고 생각하지 않았거든요. 재밌는 걸 하면서 생계도 꾸릴 수 있다니 고마운 일이었습니다. 마치 운명 같았죠.”

관람객 위주로 미술관 바꿔 금융위기 극복

그는 승승장구했다. 세계 각국의 예술기관과 축제에서 일하며 차근차근 책임을 키워갔다. 1995년에는 네덜란드 로테르담의 비테 데 비트(Witte de With) 예술감독으로 6년간 일했다. 2002년에는 타이베이 비엔날레 큐레이터를 맡았다. 아시아 예술을 접하기 시작한 것도 이때였다. 2011년 독일에서 열린 세계적인 예술축제 카셀 도큐멘타에서는 당시 가장 젊은 작품 선정위원으로 활약했다.그가 가장 오래 근무한 곳은 스페인 바르셀로나 현대미술관(MACBA)이다. 2004년 전시와 소장품 컬렉션, 보존 부문 등을 모두 담당하는 총괄 큐레이터로 취임했다. 4년 후에는 관장으로 뽑혀 7년간 일했다. 미술관 전체를 책임지는 관장 일은 만만치 않았다. 취임 이듬해에 스페인 금융위기가 터졌다. 미술관에 들어오는 공공기금은 30%, 지원 인력은 25%가 줄었다. 조직을 새로운 상황에 빨리 적응시키는 게 관건이었다. 미술관을 관람객 위주로 바꿨다. 대중의 의견을 듣는 소통 부문에 투자했다. 새로운 관람객을 발굴하는 프로그램도 강화했다. 미술관 규모는 줄었지만 수입과 관람객 수, 영향력은 더 커졌다.

“저는 아주 작은 화랑에서부터 경험을 쌓았습니다. 미술관 외부인으로서 평론을 쓰기도 했고요. 다양한 경험을 통해 현장을 파악했고, 덕분에 효율적인 체계를 세울 수 있었죠.”

한국은 새로운 시작을 위한 곳

진짜 위기는 지난해 찾아왔다. 3월에 열린 ‘야수와 주권’ 전시에 나온 설치작품 한 점이 도화선이 됐다. 후안 카를로스 전 스페인 국왕을 조롱하는 작품으로, 법적으로 문제 소지가 있었다. 큐레이터들에게 그 작품을 전시에서 빼라고 지시했다가 그들이 불복하자 전시를 취소했다. 검열 논란과 함께 대중의 비난이 미술관에 쏟아졌다. 그는 1주일 만에 결정을 번복하고, 사임서를 제출했다.

“전시를 취소한 것은 전적으로 잘못된 결정이었습니다. 저는 검열엔 절대 반대합니다. 당시 제 결정이 미술관의 위기를 초래한 것을 깨닫고, 그 실수에 대한 책임으로 사직서를 제출한 것입니다. 잘못한 일이었지만 계속 후회만 하고 싶지는 않아요. 이제부터는 과거 대신 지금 하는 일로 평가받고 싶습니다.”

그는 사임서를 낸 뒤 바로 다음 행보를 준비했다. 이력서를 수정하고, 새로운 선택지를 위해 마음을 가다듬었다. 그러던 중 한국 국립현대미술관이 관장을 뽑는다는 소식을 들었다.

“한국은 제가 새로운 시작을 하기에 더없이 좋은 곳이라고 봤습니다. 거의 30년간 유럽 미술계를 봐왔으니, 그 정도면 충분하다고 생각했어요. 새로운 경험을 하고 싶었죠. 한국 예술에 관심이 많기도 했고요. 2005년 부산 비엔날레 때 처음 방문했고, 이후엔 공식 일정 외에 예술 동향을 보려고 종종 한국을 찾았어요.”

전시든 조직 운영이든 ‘최상’이 목표

그에게 한국은 ‘무한한 가능성의 장’이다. 개인적으로 새 인생을 시작하는 곳이기 때문만은 아니다. “아시아 미술이 세계에 제대로 알려지기 시작한 것은 얼마 되지 않습니다. 지금까지는 미술계가 서구 중심으로 돌아갔지만 이제는 지역적 다양성이 중요해졌어요. 한국 미술에 가능성이 열린 거죠. 동아시아는 세계 예술계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잠재력이 큰 곳 중 하나입니다. 저는 그 잠재력을 현실화하는 책임을 갖고 이 자리에 있는 거고요.”

그는 “외국인 관장으로서 받는 우려에 대해 잘 알고 있다”며 “모자란 점은 한국 전문가의 도움을 받고, 국제 전시기획자로서의 강점을 살려 질 높은 예술품과 흥미로운 전시를 소개할 계획”이라고 말했다.

“임기 3년 동안 결과에 집중하고 싶습니다. 미술관은 과정이 아니라 결과물로 판단받는 곳입니다. 이전과는 다른 문화권에서 일을 하지만 결국 목표는 제가 수십년간 일해온 것과 같아요. 미술관의 수준을 높여 세계 무대에 올려놓는 거죠. 이를 이루는 방식 자체는 크게 다르지 않을 것으로 생각합니다.”
■ "작가도 작품도 '좋은 이야기'가 있어야…한국만의 스토리 알리는데 집중할 것"

바르토메우 마리 리바스 관장은 ‘스토리텔링과 네트워킹’을 강조한다. 각각의 예술가와 작품을 잇는 연결고리를 찾아 이야기를 만들고, 이를 세계 미술 흐름과 연결해야 한다는 얘기다.

그는 “한국 미술에는 세대별로 특징이 있고, 좋은 작가가 아주 많다”며 “세계 무대에서 주목을 끌 가능성이 무궁무진하다”고 말했다. 다만 보완해야 할 게 있다. 우수한 작가들을 한데 아울러 세계 무대에 알릴 ‘한국만의 스토리’다.

“세계적으로 이름이 알려진 한국 작가는 여럿 있어요. 하지만 개인이 유명한 선에 그치죠. 이들이 서로 어떤 관련이 있는지, 한국 예술·문화가 어떤지는 잘 몰라요. 예술계에서 한국의 영향력을 키우려면 한국의 독특한 지역성을 발굴하는 것만으로는 부족합니다. 이를 국제적 예술 담론에 연결하는 것이 진짜 세계화입니다.”

마리 관장은 이를 위해 국립현대미술관의 전시, 출판, 토론회 활동을 적극 활용할 생각이다. 새로 작품을 사들이는 것 외에 기존 소장품 목록에서 이야기를 뽑아내는 것도 중요하다. 그는 “요즘은 한국인의 손으로 만든 공예품·서예 작품과 현대미술 사이의 연계성을 살피고 있다”고 귀띔했다.

“기존 작품을 재해석하고, 이야기를 축적하는 과정 자체가 새로운 역사가 됩니다. 그래서 스토리텔링은 우리 미술관만의 일이 아니에요. 예술가와 비평가, 대중의 수많은 목소리를 반영해야 합니다. 미술관은 국립기관으로서 방향을 제안할 뿐이고요.”

국립현대미술관은 올해부터 전시 횟수를 줄인다. 양보다는 질에 집중하겠다는 것. 국내외 큐레이터, 평론가와 사상가를 모은 연구 레지던스 프로그램도 개발할 예정이다.“세계 각국의 수준 높은 예술인들이 한국에 올 수 있도록 힘쓸 것입니다. 세계 무대에서 목소리를 키우려면 수출뿐 아니라 수입도 해야 하니까요. 세계 각국 미술관과 협업 전시도 추진 중입니다. 한국 미술이 세계 무대에서 제자리를 찾게 할 것입니다.”

글=선한결 기자 always@hankyung.com/ 사진=허문찬 기자 sweat@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