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광 소나타' 선율처럼 단색에 빠진 40년

70대 여성 모노크롬 이정지 화백

내달 5일까지 선화랑에서 개인전
서울 선화랑에서 개인전을 열고 있는 이정지 화백이 자신의 작품 ‘O’시리즈에 대해 설명하고 있다.
“1980년대 초 모노크롬(단색화) 작업을 처음 시작하는 날, 가슴 밑바닥에 눌려 있던 열정을 캔버스에 폭발적으로 쏟아낸 기억이 지금도 생생합니다. 몸 안에 있는 신비한 현상들이 색깔을 통해 분출하는 느낌이었지요. 그땐 아마 무언가에 홀려 ‘색채 홀릭’에 빠진 것 같았어요.”

국내 여성 작가로는 드물게 모노크롬 분야에서 독자적인 영역을 개척해온 이정지 화백(75). 그는 자신의 모노크롬 입문에 대해 “여태껏 꿈꿔 온 그림에 대한 열망을 흑과 백으로 잡아내는 것이었다”고 말했다.다음달 5일까지 서울 인사동 선화랑에서 개인전을 펼치는 이 화백은 초기에는 대상을 지워내는 탈(脫)이미지 작업에 매달렸다. 하지만 곧바로 박서보, 하종현 화백과 함께 모노크롬에 빠져 인간의 소통과 치유 문제를 색채 미학에 녹여냈다.

서울 홍익대 인근 작업실에서 매일 10시간 이상 붓질에 매달린다는 작가는 “드라마틱하게 느껴지는 색의 꿈틀거림 속에는 해수면의 잔잔한 율동 같은 게 숨어 있는 것 같다”고 말했다. 그는 안료를 화면에 일고여덟 차례 덧칠하고 긁어내는 작업을 반복함으로써 남은 흔적을 통해 시간과 공간의 변화를 추적한다. 1990년대 중반부터는 사물의 이미지 대신 문자를 칼로 새겨내 문학적인 요소와 회화적인 요소를 같은 화면에 살려냈다.

그는 “때로는 안진경체를, 또 때로는 추사체를 적극적으로 사용했는데 덧칠 후 긁어내는 작업을 통해 숨겨진 글씨를 드러냄으로써 소통을 이끌어낸 것”이라고 설명했다. 쓰기와 지우기를 통해 생성과 관념, 사물과 언어, 현실과 상상,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허문다는 얘기다. 그는 안진경체와 추사체를 익히기 위해 수십년째 매일 연습을 거듭하고 있다. 그러나 ‘흉내 내기’를 피하려고 붓 대신 팔레트 나이프로 글씨를 쓴다.“붓으로 흉내 내기보다 팔레트 나이프로 어눌하게 쓰는 편이 호소력 있게 느껴져서요. 어떤 때는 서체를 살리고 또 어떤 때는 매몰하면서 제가 추구하는 ‘원초적인 세계’를 보여줄 수 있지 않나 싶습니다.”

그가 평생 몰두한 동그라미를 활용한 ‘O’시리즈는 화면 위에 시작도 없고 끝도 없는 시공간을 흑과 백, 브라운 색감으로 수놓았다. 화면의 비움과 채움 과정을 거쳐 태어난 색감은 다양한 이미지를 응축해내며 베토벤의 ‘월광 소나타’ 선율처럼 흐른다. 젊은 날의 정열과 사랑의 고뇌를 나타낸 환상곡 풍의 미감이 더욱 그렇다. ‘왓 아트/아 유 두잉 나우?’(What ART/ARE you doing now?)를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서는 쓰기와 지우기를 반복해 색감이 흐르는 모습을 색면으로 승화한 대작 30여점을 만날 수 있다. (02)734-0458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