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상춘의 국제경제 읽기] 총선 이후 '한국 경제 위기론'…그 실체와 과제

경제 지표보다 시스템이 문제
여론 의식한 '땜질 처방' 벗어나야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
요즘 나라 안팎에서 한국 경제 재평가 작업이 한창이다. 그중에서 한국 경제 상황에 비교적 밝은 해외 기관일수록 ‘4·13 총선 이후 한국 경제가 더 혼란스러워질지 모른다’는 평가를 중심으로 재차 불거지고 있는 ‘한국 경제 위기론’과 박근혜 정부가 이런 위기론을 불식시킬 수 있을 것인지 여부에 주목하고 있다.

한국 같은 위기 경험국의 위기극복 정도를 평가하는 데에는 ‘위기 3단계론’이 적용된다. 특정국은 외환관리 등에 금이 가면서 유동성 위기가 발생한다. 유동성에 문제가 생기면 담보 관행이 보편화한 국가일수록 경제시스템 위기로 비화하고, 실물경제 위기로 치닫는다는 게 이 이론의 골자다. 위기를 극복하는 과정도 이 절차를 거쳐야 한다.
위기 경험국은 유동성 위기를 해결한 뒤 시스템 위기를 극복하는 단계로 순조롭게 이행하지 못했다. 한국도 외화 유동성을 확보한 이후 잦은 정책변경, 정부 혹은 정책에 대한 신뢰 부족 등으로 시스템 위기 극복이 지연되는 과정에서 실물경기 회복이 완전하지 못한 채 20년이 지났다는 평가가 일반적이다.

더 우려되는 것은 시스템 위기와 실물경기 위기극복이 지연될수록 각종 착시현상에 따른 투기적인 요인이 커지는 대신 위기 불감증으로 인해 대처능력이 약해진다는 점이다. 이때 투기적인 요인이 차익 실현으로 연결되면 극복했다고 본 유동성 위기가 다시 발생한다는 것이 ‘위기 재귀론’이다.현 정부 출범 이후 우리 경제 안정성이 계속해서 흔들리고 위기론이 가시지 않는 것은 ‘통계수치의 위기’가 아니라 경제입법과 정책운용체제를 중심으로 한 ‘사회시스템 위기’에서 연유한다고 볼 수 있다. 이 때문에 경제 안정성을 제고하기 위해선 경제현실에 대한 정확한 진단부터 선행돼야 한다.

이런 현실진단을 토대로 경제시스템을 안정시킬 수 있는 대책을 마련해 나가야 한다. 특히 성장 견인차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수출이 세계경제 환경이나 환율이 조금만 불리해지면 크게 감소해 곧바로 위기감이 닥치는 소위 ‘천수답 구조’를 ‘수리안전답 구조’로 전환하기 위해선 땜질식 단기 처방은 금물이다.

김대중, 노무현, 이명박 정부와 마찬가지로 현 정부도 4·13 총선과 내년에 있을 대통령 선거를 의식해 경제우선 정책을 예산 조기집행 등과 같은 단기 처방에 의존하면 고질병인 ‘고비용-저효율’ 문제를 개선하는 일은 요원해진다. 오히려 구조조정(개혁) 노력을 지연시킴으로써 현 세대와 후손이 부담해야 할 사회적 비용은 엄청나게 늘어난다.기업에도 한국 경제 내에서 안정된 경영활동을 보장하고, 해외 진출한 기업이 국적을 잊어버리지 않기 위해선 그것이 개혁정치든, 산업정책이든 정책의 일관성과 명확한 기준이 전제돼 시행해야 한다. 규제 완화를 추진하면서 기득권 때문에 핵심규제 사항을 풀지 못하거나, 특정 기업에 막대한 이권이 보장되는 신규 사업을 허가해주면서 뒷거래가 오가는 식의 뒷맛이 가시지 않는 정책이 계속되면 위기감만 키울 가능성이 높다.

결국 이것은 한국 기업의 ‘무국적화’를 촉진하고 산업공동화와 실업증대 등의 커다란 부작용을 낳는다. 기업도 경기가 좋을 때는 ‘한탕’ 하고 경기가 나쁠 때는 정부 지원을 바라는 ‘화전민(火田民)식 경영’은 지양해야 한다. 정치권과 정책당국이 실망스럽더라도 지속 가능한 성장 기반을 마련하기 위한 투자는 의무다.

국민에게 경제 현실을 올바르게 바라볼 수 있는 시각과 안정된 경제생활을 영위할 시스템을 마련해주는 것도 시급하다. 법규든, 사회규범이든 정책당국이 마련하는 대로 좇아가더라도 고위층에서 뇌물이다, 떡값이다 해서 부패가 발생하면 국민은 상대적 박탈감과 허탈감에 휩싸여 위기를 낳게 하는 원인이 된다.정부가 시행하는 정책을 적극적으로 지원해주는 발상의 대전환도 필요하다. 국민이 정부 정책에 갈수록 냉소적인 반응을 보이는 것은 정책당국(정치권의 책임이 크다)이 국민에게 신뢰를 줄 만큼 올바르게 국정을 운영하지 못한 측면이 많았기 때문이다.

하지만 정책당국이 아무리 좋은 정책을 편다고 해도 국민이 부응하지 않으면 또다시 정책을 내놔야 하는 ‘정책의 악순환’만 되풀이될 가능성이 높다. 나 자신을 희생한다는 생각(프로보노 퍼블리코)을 전제로 정책결정 과정에 여론이 반영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동시에 일단 정책이 추진되면 소기의 효과가 나올 수 있도록 적극 후원해줘야 한다.

지금은 경제가 어렵다. 이럴 때일수록 기본과 원칙을 지키면서 정치권과 정책당국은 진심으로 정책 수용층의 협조를 구해나가는 자세가 중요하다. 조금만 뜻대로 안 되면 ‘과거 정부와 언론, 국민 탓’을 하면서 미래에 대한 비전을 제시하지 못한다면 또다시 싹이 돋고 있는 ‘한국 경제 위기론’이 어느 날 갑자기 찾아온다는 점을 명심해야 한다.

한상춘 객원논설위원 scha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