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소·보리밭·백두산…한민족 뿌리 50년 붓질"

한국채색화 대가 이숙자 화백, 국립현대미술관 회고전

14m 대작 '백두산' '보리밭' 등 60점 선봬
"채색화 정통성 계승"
‘보리밭 누드화’로 유명한 이숙자 화백(74·사진)은 50세가 되던 1992년 백두산을 그리겠다고 마음먹었다. 하지만 한 번 가보지도 않고 그릴 수 없어 도중에 포기하고 말았다. 그러다가 1999년 북한 만수대창작사 초청으로 10여명의 작가와 함께 8박9일 동안 백두산 여행을 하면서 다시 기회가 찾아왔다. 서울에 돌아온 그는 백두산 정상에 올랐을 때의 가슴이 터질 듯한 감동과 느낌으로 작업에 몰입했다. 2001년 완성한 가로 14m, 세로 2m의 초대형 작품을 시작으로 그는 지난 10여년간 백두산의 장대한 스케일과 정기를 포착한 작품을 줄줄이 쏟아냈다.

최근작 백두산 그림을 포함해 ‘보리밭’ ‘한글’ ‘소’와 대학시절 그린 누드 드로잉까지 이 화백의 50년 미술인생을 감상할 수 있는 전시회가 마련됐다. 경기 과천 국립현대미술관에서 지난달 25일 시작해 오는 7월1일까지 펼쳐지는 회고전이다. 국립현대미술관의 장기 프로젝트인 ‘현대미술작가’ 시리즈 한국화 부문 세 번째 전시로, 관람객이 온몸을 열어 한국 채색화 속으로 스며들 수 있게 꾸민 교감의 향연장이다.
국립현대미술관 과천관에 전시된 이숙자 화백의 ‘백두산’.
채색화는 화면에 색을 칠한다는 점에선 서양의 유화와 같지만 분채(안료가루), 석채(돌가루) 등을 아교(접착제)에 개어 물과 함께 한지 바탕에 칠하는 것이 다르다. ‘초록빛 환영’을 주제로 한 이번 전시에는 시퍼런 녹색의 이삭들이 눈을 시리게 하는 ‘보리밭’, 한민족의 생명력을 담아낸 ‘백두산’, 화려한 오방색을 실험한 민예품 등 한국적인 정서를 대표하는 소재를 그린 채색화 60여점을 걸었다.

그동안 한국화의 정체성 확립과 채색화의 정통성 수립을 두 축으로 삼아온 이 화백은 “지난 반세기 동안 단순히 대상의 표피만을 그린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투철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절실한 감성과 희망을 그린 것”이라고 설명했다.

박생광 김기창 천경자 화백에게 그림을 배운 이 화백은 지난 50년 동안 일관되게 채색화의 정통성에 대한 강한 신념을 바탕으로 작업해 왔다. 채색화의 맥을 잇는 걸 사명으로 여긴 그는 젊은 시절부터 한국적인 소재를 찾아 헤맸다. 초기에는 전통 오방색을 되살리려 색동저고리를 그렸다. 서민들의 삶의 현장을 찾아 시장 사람들과 모내기하는 모습도 담아냈다.1977년에는 시동생의 하숙집을 방문하던 길에 만난 보리밭에 ‘필’이 꽂혀 ‘보리밭’ 시리즈를 시작했다. 1989년에 발표한 ‘이브의 보리밭’은 한국 화단을 떠들썩하게 했다. 보리밭에 누워 있는 알몸의 여성도 화제였지만 체모가 그대로 드러나 더욱 주목을 받았다. 벌거벗은 여성을 통해 한국 여인의 내면을 풀어냈다는 평가를 받으면서 그의 이름을 단번에 유명 작가군에 올려놓았다. 이 화백은 “운명의 굴레를 벗어버리고 인습에 저항하는 한국의 여성상이 ‘이브’로 나타난 것”이라고 설명했다.

한국의 뿌리를 찾는 탐색은 ‘백두산’ 연작으로 이어졌다. 백두산을 통해 한국적인 것을 재발견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 50년 동안 일관되게 추구했던 ‘한국성’을 구현할 수 있는 기념비적인 작업을 남기고 싶은 욕심도 생겼다. 채색이 주는 안정감과 거대한 산의 위압감이 절묘하게 조화를 이루도록 신경을 썼다. 그림의 빛깔이 변하지 않도록 하기 위해 그는 일본에서 수입해온 암채(巖彩·광물성 안료)와 국산 금분(金粉)을 사용했다.

칠순을 넘어선 여성 화가의 손끝에서 태어난 백두산 그림들은 한민족의 웅장하고 강인한 생명력으로 다가온다. 전시장에는 일산 작업실을 그대로 옮겨와 재현했다. 전시 기간에 채색화 작업과정도 보여줄 예정이다. (02)2188-6000

김경갑 기자 kkk10@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