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IZ Insight] "품질 희생하느니 생산 않겠다" 머크가의 300년 경영철학, 30만종 의약·화학품으로 부활

Best Practice 머크

1668년부터 '제약 외길'
19세기 당시 원료값 급등하자 일부 사업 포기하고 연구개발 집중

머크 가문이 지분 70% 보유
빠른 의사결정 구조 갖춰…70兆 규모 M&A 한달 만에 성사

年 2만6000여개 특허 신청
"일반 의약품부터 액정·프린팅까지 다양한 특허 보유가 성공 비결"
한국 주식시장에선 지난해부터 갑자기 제약·바이오 열풍이 불었다. 지난해부터 급격하게 실적과 주가가 뛰어오른 만큼 거품이라는 의견도 많다. 하지만 348년간 꾸준히 성장을 이어온 고목 같은 제약업체가 있다. 독일의 머크사다.

머크는 항암제, 노화방지 화장품 원료부터 코팅제, 세포계수기, 액정에 이르기까지 30만종의 제품과 특허를 확보했다. 매출 기준으로 유럽 제약사 중 10위에 올라있다. 작년 매출은 128억유로(약 17조원)에 이른다. 합성의약품 복제약(제네릭)과 항체의약품 복제약(바이오시밀러)의 등장으로 제약업계의 경쟁이 심화되는 추세에도 머크는 전 사업부에서 매출이 증가하며 348년을 버텨온 저력을 보여주고 있다.348년 전 ‘천사약국’에서 시작

머크의 역사는 1668년 프리드리히 야콥 머크가 독일 중부 인구 2100여명의 소도시인 다름슈타트의 ‘천사약국(Engel Apotheke)’을 인수하면서 시작됐다. 이후 5대인 하인리히 머크는 일반 약사와는 달리 화학 전문지식을 갖고 있었다. 그는 1820년대 마취제, 신경작용제, 향균제 등 다양한 용도로 활용되는 알칼로이드를 순수 형태로 분리해내는 방법을 개발해 양산했다. 하인리히 머크를 시작으로 머크사는 연구개발을 중시하고 틈새시장을 만들어내는 데서 강점을 찾았다. 1900년엔 1만여종의 기초 약물 및 화학제품과 50개의 전문의약품을 공급했다.머크는 ‘품질을 희생하느니 생산하지 않겠다’는 경영철학을 갖고 있다. 1842년 독일 마인츠에서 열린 독일 산업박람회 공식 보고서에는 “하인리히 머크의 상품은 순도 면에서 다른 공장 상품을 압도한다는 게 심사위원들이 만장일치로 내린 의견”이라고 적혀 있다. 1830년엔 콜레라가 유행하자 살균 작용을 하는 염화석회를 생산했다. 하지만 경쟁이 가열되면서 원료 가격이 오르자 사업을 포기하기도 했다. 가격 경쟁력을 위해 품질을 희생할 수는 없다는 게 하인리히 머크의 의견이었다. 연구개발과 품질관리에 승부를 거는 머크의 방식은 유효했다. 1840년에는 러시아와 터키까지 판로를 확장했다.

머크는 두 번의 전쟁과 다섯 번의 통화개혁 속에서도 살아남았다. 제2차 세계대전 중인 1944년에는 폭격으로 생산설비의 75%가 파괴됐다. 하지만 머크의 직원들은 1945년 전쟁이 끝나자 회사로 돌아왔다. 800~900명의 직원이 스스로 폐허가 된 공장을 재건했다. 머크는 직원들의 힘으로 전쟁 직후 생산을 재개했다.

머크가(家)의 경영 신조는 ‘기업의 성공은 사람과 더불어 시작된다’는 것이다. 19세기 머크의 고용 계약서엔 직원이 20년 이상 일하면 연금을 지급하며, 질병을 앓거나 다쳤을 때도 급여를 지급하도록 돼 있다. 직원의 책임도 강조된다. 경영진은 무한책임사원으로서 퇴직 후 5년까지 무한책임을 진다. 머크 내에서는 지금도 이들 경영진의 영입을 ‘입양’이라 부르고 그들을 가족의 일원으로 인식한다.‘가족기업’의 강점을 살리다

머크는 전체 지분의 70%를 머크 가문이 갖고 있는 가족기업이다. 머크가 348년간 지속할 수 있었던 원인도 가족기업이라는 점에 있다. 머크가는 가진 지분을 팔지 않고 가족위원회를 구성해 경영진을 감독하는 역할을 맡고 있다. 전문경영인(입양가족)이 머크를 경영한다.가족기업인 머크는 단기차익을 노리는 주주가 없다는 점에서 신제품과 시장을 키울 시간적 여유를 가질 수 있었다. 연구개발(R&D) 투자 비중(15.52%)은 경쟁사인 바이엘(11.11%)에 비해 높은 편이다. 장기투자 덕에 머크가 개발해낸 의약품 및 화학제품은 5만5000여개에 이른다. 전문·일반 의약품과 액정·프린팅·코팅·화장품·태양광 패널 등 특수제품이 있다. 오늘날 디스플레이와 유기발광다이오드(OLED), 태양전지 등에 사용되는 액정을 1904년부터 연구하기도 했다.

감독구조가 간단해 의사결정이 빠르게 이뤄질 수 있다는 점도 경영상의 이점이다. 2010년 미국 의학실험 장비업체 밀리포아를 인수할 때도 한 해 매출의 절반이 넘는 52억달러(약 70조원)을 들였지만 주주 동의를 얻는 데 걸린 시간은 단 4주였다. 머크는 밀리포아를 인수하면서 생물학 연구분야, 바이오의약품 테스트, 의약품 제조분야 관련 기술 및 기자재 사업을 추가할 수 있었다.

기업 인수·연구개발로 30만종 제품·특허 확보

머크도 다른 제약사처럼 2000년대 들어 위기를 겪었다. 제네릭과 바이오시밀러 제품이 늘면서 제약시장 경쟁이 치열해졌다. 다른 제약사들이 제네릭과 바이오시밀러에 힘을 기울일 때 머크는 2007년 제품유통 부문과 제네릭사업 부문을 매각했다. ‘우리가 힘을 쏟을 분야는 혁신사업이지 범용재가 아니다’라는 머크가의 철학 덕분이었다. 범용재의 경쟁력은 결국 가격에서 나온다. 복제약 생산 규모를 늘리면 당장 수성은 가능하지만 수익성은 계속 악화될 수밖에 없다는 게 경영진의 의견이었다.

머크는 주력 사업인 의약·화학품 분야에서 다양한 제품군과 특허를 확보해 틈새시장을 파고들었다. 머크는 의약 분야에서 항암제, 다발성 경화증, 불임, 자가면역 및 염증 시장 등 치료제 사업에 강점이 있는 세로노를 2007년 인수하면서 헬스케어 사업을 더욱 강화했다. 최근엔 생명과학 기업인 시그마 알드리치를 인수해 생명과학, 기능성 소재 사업 부문에서 제품 종류를 30만종까지 늘렸다. 2014년 화학분야에서 AZ일렉트로닉머티리얼즈를 인수하며 OLED 분야 첨단물질 특허도 확보했다.
독일 헤센주(州) 다름슈타트 시에 있는 머크 본사 건물.
핵심 사업인 의약품·화학에 집중 투자해 다양한 제품군·특허를 확보하면서 머크의 매출은 2014년 115억유로에서 지난해 사상 최대인 128억유로까지 늘었다. 영업이익도 18억유로로 2014년보다 6% 늘었다.머크는 지난해 연구개발(R&D)에 영업이익과 맞먹는 17억유로(약 2조3000억원)를 투자했다. 매출의 약 15% 수준을 꾸준히 유지하고 있다. 적극적인 R&D 투자로 매년 2만6000여개의 특허를 신청한다. 신기술 특허에서 매년 선두를 다투고 있다. 존 바움하우어 전 가족위원회 회장은 “우리는 (제품종류가 적은) 다른 기업이 판단 실수로 시장에서 손을 털고 나갈 때도 (다양한 제품·특허 덕에) 사업을 유지할 수 있다”고 말했다.

박진우 기자 jwp@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