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평생 바이러스와 싸운 미생물 학자 이호왕
입력
수정
지면A21
한국과학창의재단 공동기획
국민이 뽑은 과학자 (2) '바이러스박사' 이호왕
2차 대전과 6.25전쟁 중 수천명의 희생자 냈던 공포의 유행성출혈열
각국서 원인조차 모를 때 한탄강 등줄쥐서 병원체 발견
"끈기와 아이디어의 결과물"


바이러스, 진단법, 백신 모두 개발
때마침 1969년 휴전선에서 근무하던 군인과 인근 주민 사이에 정체 모를 괴질이 퍼지면서 그는 이 분야를 파보기로 했다. 평생 업이 될지 이때는 몰랐다. “5년간의 연구에도 좀처럼 결과를 내지 못했습니다. 연구비를 지원하는 미 육군을 설득해가며 겨우 연구하던 중 쥐를 잡던 채집원 한 명이 이 괴질에 감염되면서 등줄쥐가 유력한 매개체로 지목됐습니다.”
하지만 막상 바이러스가 있는 곳을 찾는 일은 쉽지 않았다. 모든 장기 조직을 일일이 떼어내 조사했지만 모두 허사로 돌아갔다. 전자현미경이 없던 시절이라 항체가 있는 혈청에 형광물질을 묻혀 바이러스를 찾는 형광항체법이란 검사법을 도입했다. 1975년 12월 마침내 등줄쥐 폐 조직에서 혈청과 반응해 밝게 빛나는 바이러스가 처음 눈에 들어왔다. 이 교수는 그 순간을 떠올리며 “마치 은하수 별빛 같았다”고 했다. 이듬해인 1976년 학계에 한탄바이러스 발견 사실을 공식 발표했다. 1981년에는 서울 마포구 한 건물 지하상가에서 잡은 집쥐에서 한탄바이러스 친척뻘 되는 서울바이러스도 찾아냈다. 해외에서 유전학적으로 비슷한 푸우말라바이러스, 프로스펙트힐바이러스가 잇달아 분리됐다.세균전 수행, 간첩 오인 받기도
바이러스 연구 창의적 아이디어 필요
이 교수는 지난해 말 대한바이러스학회에 논문 하나를 또 발표했다. 세계 곳곳에서 발견된 30여종에 이르는 한타바이러스를 정리한 일종의 족보다. 국제 학계는 한탄·서울바이러스와 비슷한 바이러스의 상호관계를 정립하기 위해 이들 바이러스의 속(屬) 이름을 한타바이러스로 지었다.이 교수는 한탄바이러스와 비슷한 바이러스가 지금도 세계를 위협하고 있다고 했다. 1994년 미국의 아메리카 인디언인 나바호족에서 갑자기 피를 토하고 죽어가는 환자들이 발생했다. 한타바이러스폐증후군으로 불리는 이 병은 폐렴을 일으키고 1주일 안에 숨지게 할 만큼 치명적이다. 아프리카와 아시아에선 쥐가 아니라 박쥐에서도 발견되고 있다. 그는 “바이러스 연구는 지금처럼 남의 연구를 좇는 방식으로는 결코 성과를 낼 수 없다”며 “NIH와 같은 세계적 연구기관에서 연구비를 따낼 수 있는 수준급 실력과 아무도 생각 못하는 창의적 아이디어가 필요하다”고 강조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