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자 칼럼] 하이디 토플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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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앨빈 토플러가 아내 하이디 토플러(원이름 아델라이데 엘리자베스 패럴)를 만난 건 1948년 뉴욕대(NYU) 앞 워싱턴스퀘어 공원에서였다. 앨빈이 20세, 하이디가 19세 때였다. 하이디는 NYU 대학원에서 언어학을 전공했으며 앨빈 역시 NYU에서 영어를 전공했다. 앨빈은 폴란드계 이민출신이었고 하이디는 독일계였다. 서구 이민자 출신인 두 사람은 특히 미국 사회의 가치에 대해 얘기를 많이 나눴다. 당시 뉴욕은 급진 좌파가 득세하는 분위기였다. 2차대전 유럽에서 전쟁을 치르고 돌아온 군인들은 대부분 좌파적 생각에 매몰됐다. 대학도 마찬가지였다. 이들 두 사람도 분위기에 휩쓸렸다. 미국을 사회주의 국가로 만들어야 한다고 생각했다.
앨빈과 하이디는 학교를 그만두고 결혼한 다음 직접 오하이오 클리블랜드 공장지대로 이주했다. 앨빈은 그곳에서 용접공으로 일하고 하이디는 GE 공장에서 전구를 만드는 일에 뛰어들었다. 노동조합 사무직원으로도 일했다. 5년간 공장에서 노동을 체험한 이들은 사회주의의 모순과 노동운동의 한계를 느꼈다. 공장에서 나와 앨빈은 신문기자로 일하고 하이디는 비즈니스 관련 사설 도서관에서 사서로 근무했다.하이디는 앨빈이 포천지에 글을 쓸 때부터 앨빈의 조력자요, 멘토이자 코치였다. 앨빈은 생전의 인터뷰에서 “주간에 글을 쓰면 저녁에 하이디가 그 글을 읽었고 우리는 밤늦게 토론했다. 때로는 논쟁을 하기도 했다. 하이디는 애초부터 나의 글쓰기 작업의 한 부분이었다”고 술회한 적이 있다. 특히 하이디의 도서관 사서 경험은 남편에게 풍부한 자료를 제공하는 데 큰 도움을 줬다.
하지만 《미래쇼크》나 《제3의 물결》 등 앨빈의 초기 저작물은 단독 저자 형태로 출간됐다. 하이디는 당시 서적에 이름을 같이 내야 한다는 건 상상도 하지 못했다고 한다. 하지만 주위의 충고를 받은 뒤 그들은 공동 저자로 책을 출간했다. 앨빈과 하이디가 공동으로 참여한 첫 작품은 1993년에 집필한 《전쟁과 반전쟁》이었다. 이 책은 아이디어뿐 아니라 집필에도 하이디가 많이 간여했다고 한다.
이후 출간된 《부의 미래》나 《불황을 넘어서》 등 각종 저서는 공동 저자로 나왔다. 하이디도 본격적인 미래학자로 활약을 펼치게 된 것이다. 하이디는 남편의 강연에 꼭 참석해 현장 멘토 역할을 했다. 앨빈은 강연 내내 하이디의 눈치를 살폈다는 일화도 있다. 남편과 아내가 한 가지 주제로 전문가의 반열에 오르기는 쉽지 않다.
오춘호 논설위원 ohchoon@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