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홍영식의 정치가 뭐길래] 레이건의 ‘유머정치’가 부러운 이유는

‘촌철살인’ 유머로 상대 굴복시키는 ‘소프트 파워’

우리 정치는 막말 고성 난무…유머와 재치로 소통을
정치부장 시절, 2014년 1월6일자 ‘한경데스크’란에 ‘분노의 정치, 품격의 정치’라는 제목의 칼럼을 썼다. 우리 정치권에서 툭하면 막말, 욕설이 터져 나오는 현상을 비판적으로 짚었다. 새해 들어 여야가 막말 추방 약속을 한 것을 계기로 칼럼을 쓴 것이다. 내용은 아래와 같다.

『분노는 인류 생존에 필요한 기능을 한다는 게 학자들의 주장이다. 아리스토텔레스는 “마땅히 분노해야 할 일에 분노하지 않는 것도 중용을 지키지 않는 것”이라고 했다. 프랑스의 유명한 레지스탕스인 스테판 에셀은 저서 ‘분노하라’에서 “기뻐해야 할 때 기뻐할 수 있는 것처럼, 분노해야 할 때 분노할 수 있는 사회가 건강한 사회”라고 했다. 분노는 경쟁에서 살아남는 수단, 사회 발전의 자극제가 될 수 있기 때문이라는 것이다.정치인들에게 분노는 옳다고 믿는 것을 향한 강력한 자기 표현이 될 수 있다. 그래서일까, 말로 먹고사는 정치인들의 언행은 거칠기 일쑤다. 지난해 우리 정치권에선 막말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홍익표 민주당 의원은 박정희 전 대통령을 태어나지 않았어야 하는 사람을 이르는 ‘귀태(鬼胎)’라고 했고, 김한길 민주당 대표는 황우여 새누리당 대표와의 회담에서 ‘쾅’하고 테이블을 내려치며 “누가 죽나 한번 보자”고 소리쳤다.

새누리당의 전력도 만만치 않다. “공업용 미싱으로 입을 드르륵…(1998년 당시 김홍신 한나라당 의원, 김대중 대통령을 향해)”, “노가리(2004년 한나라당 의원들의 ‘환생경제’ 연극)” 등이 대표적 예다. 2009년 천정배 당시 민주당 의원은 이명박 대통령을 향해 ‘쥐박이’라고 했다.

문재인 민주당 의원은 2012년 대선을 되돌아 보는 ‘1219 끝이 아니라 시작이다’라는 제목의 책에서 “싸가지 없는 진보를 자초한 건 아닌지 겸허한 반성이 필요한 때”라고 썼다. 진보적 가치에 동의하면서도 막말이나 거친 태도를 싫어하는 성향을 ‘태도보수’라고 하는데, 대선에서 민주당이 ‘태도보수’의 유탄을 맞았다는 이낙연 민주당 의원의 대선 패배 분석에 동의했다. 그렇지만 문 의원도 대선 재도전 의지를 드러내면서 “정부의 종북몰이에 제일 ‘분노’한다”고 했다.정치인의 진정한 카리스마는 말에서 나온다. 분노에 정복당하는 순간 이성적 논의 구조는 사라진다. 처칠은 숱한 명언으로 전쟁으로 지친 영국 국민들의 마음을 어루만지고 희망을 심어줬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지난 연말 국회를 방문해 자신의 50여년 정치사를 회고하면서 “공자께서 말씀하신 사무사(思無邪) 자세로 평생 살아왔다”고 했다. 터무니 없는 생각과 행동을 삼가고 인간다운 도리에서 벗어나지 말라는 것을 지침으로 삼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정치권엔 절제의 미가 없다. 전투적 용어가 득세한다. 분노할 땐 분노해야 하나 품격이 있어야 한다. 분노의 화살은 곧 자신을 겨누는 비수가 된다. 플라톤은 분노가 선과 숭고함을 지향할 수 있는 고상한 ‘티모스(기개)’라는 덕목으로 실현될 수 있어야 한다고 했다. 분노 자체가 목적이어선 안된다는 얘기다. 우리 정치권의 분노가 과연 이런 숭고한 목적을 갖고 있는가.

새해 들어 정치권의 막말 추방 약속이 잇따르고 있다. 민주당은 막말 추방을 3대 프로젝트 일환으로 채택했다. 안철수 무소속 의원도 지난 2일 “막말 증오 등 낡은 정치행태가 새해에는 없어져야 한다”고 말했다. 약속을 지켰는지 여부는 연말에 알 수 있다. 새해에는 정치인들의 멋들어진 말의 향기로 정치 불신을 조금이라도 회복했으면 한다.』
정치권은 과연 이런 약속을 지키고 있는가. 여야 모두 경쟁적으로 새정치를 내세우는 20대 국회에서도 품격 잃은 의원들의 막말 행진이 이어졌다. 김동철 국민의당 의원은 지난 5일 국회 비경제분야 대정부 질문에서 이장우 새누리당 의원을 향해 “어떻게 대전시민은 저런 사람을 국회의원으로 뽑아놨나”고 공격했다. 이 의원은 “어디다가 대전 시민을 이야기하냐”고 반박하면서 고성과 막말이 오갔다.

상대를 제압하는 방법이 고성과 막말 밖에 없을까. 막말을 일삼는 우리 정치인과 뚜렷하게 대비되는 사람은 로널드 레이건 전 미국 대통령. 그의 이념과 정책에 동조하고 안하고를 떠나 레이건의 유머는 정평이 나 있다. 상대의 집요한 정치적 공격에도 만면에 웃음을 띠며 특유의 유머로 상대를 제압한다. 언성을 높인 사람이 오히려 민망해 하고 굴복하곤 했다.

널리 알려진 한 예다. 레이건은 1984년 73세에 재선에 도전, 월터 먼데일 후보(56세)와 TV토론 때 주고 받은 말이 화제가 됐다. 먼데일은 “당신의 나이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십니까”라고 물었다. 레이건의 고령을 들춰낸 것이다. 레이건은 “이번 선거에서 나이를 문제 삼을 생각은 없습니다”라고 했다. 먼데일은 “무슨 뜻입니까”라고 다시 물었다. 레이건은 “당신이 너무 젊고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정치적 목적으로 이용하지 않겠다는 뜻입니다”라고 답했다. 시청자들은 폭소를 터트렸다. 레이건의 완승이고 먼데일의 완패였다. 먼데일은 레이건의 고령을 문제삼으려 했다가 보기 좋게 ‘되치기’ 당했다. 할 말 잃은 먼데일도 웃을 수 밖에 없었다. 만약 레이건이 먼데일의 공격에 “나이는 많아도 건강에 문제 없다”며 감정적으로 대응하거나, 시청자 앞에서 팔굽혀 펴기라도 시연하는 등의 방식을 사용했다면 정치적 효과는 확 떨어졌을 것이다.레이건은 한 기자가 “어떻게 배우가 대통령이 될 수 있습니까”라고 묻자 레이건은 “어떻게 대통령이 배우가 되지 않을 수 있습니까”라고 멋지게 받아쳤다.

레이건은 1981년 정신이상자로부터 총격을 당하고 병원에 실려 가면서 “예전처럼 영화배우였다면 잘 피할 수 있었을 텐테” 라고 했다. 수술 뒤 의식이 깨어나자 “여보, 고개 숙이는 걸 깜빡 잊었을 뿐이야”라고 부인 낸시 여사를 다독였다.

그는 보수주의자다. 이념 논쟁 때 그는 “공산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읽은 사람이고, 반공주의자는 마르크스와 레닌을 잘 아는 사람이다” 라고 받아친 것도 유명하다.

레이건 뿐 아니다. 버락 오바마 미국 대통령은 지난 4월 30일 임기 중 마지막으로 가진 백악관 출입기자단 연례만찬 연설에서 공화당의 도널드 트럼프를 겨냥한 유머를 쏟아냈다. “공화당 지도부가 트럼프에 대해 외교정책 경험이 없다고 주장하지만 트럼프는 미스 스웨덴, 미스 아르헨티나 등 숱한 세계적 지도자를 만났다” “내년에는 다른 사람이 이 자리에 서게 될 것인데 그녀가 누구일지는 아무도 모른다” 등이다. 트럼프를 공격하면서 힐러리를 지원한 것이다.

우리 정치인들도 적지 않은 명언을 남겼다. 김대중 전 대통령은 “정치인은 무릇 서생적 문제의식과 상인적 현실 감각이 있어야 한다”고 했다. 이상과 현실의 조화를 강조한 것이다. 김영삼 전 대통령은 “잠시 살기 위해 영원히 죽는 길을 택하지 않고, 잠시 죽는 것 같지만 영원히 사는 길을 택할 것”이라고 말했다. 김종필 전 국무총리는 “국회 원내 공기가 매우 탁하다. 부드럽고 따뜻하게 바꾸면서도 한 방향으로 가야 한다. 가화만사성이란 말이 있다. 지금은 원화만사성(院和萬事成 : 원내가 화목해야 모든 일이 이루어진다)을 해야 한다” 고 화합의 정치를 주문했다. 이만섭 전 국회의장은 “싸움을 하더라도 정치는 해야 된다”고 후배 정치인들을 질타했다.고함에는 고함으로, 막말에는 막말로 되받는 풍토는 상대를 굴복시키기는 커녕, 감정의 골만 깊게한다. 레이건의 한마디는 상대를 꼼짝 못할게 할 뿐 아니라 막말과 욕설을 퍼붓는 것 이상으로 상대를 부끄럽게 만드는 효과를 낸다. 한국 정치는 너무 살벌하다. “말 한마디로 천냥 빚을 갚는다”는 우리의 좋은 속담이 있다. ‘촌철살인’의 유머와 재치는 막강한 ‘소프트 파워’가 될 수 있다.

홍영식 선임기자 yshong@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