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첫 노벨상 후보 올랐던 '국내 1호 화학박사' 이태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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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과학창의재단 공동기획
국민이 뽑은 과학자 (12) 이태규
1955년 점성 물체 흐름 연구
분자점성학 기초 닦아
국내 과학자 최초 국립묘지 안장

미국 유타대 교수로 재직 중이던 이태규 박사(1902~1992·사진)는 1964년 9월 잠시 귀국해 당시 박정희 대통령을 예방한 자리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교수의 말에 고무된 박 전 대통령은 그를 포함해 해외에 나가 있는 과학자들의 귀국을 종용하기 시작했다. 그로부터 9년 뒤 그는 유타대 교수직을 버리고 영구 귀국했다.

교수로 정식 임명을 받았지만, 그의 호기심은 지치지 않았다. 당대 최고 석학들이 모여 있는 미국 프린스턴대로 건너갔다. 그는 그곳에서 이론 화학을 연구하던 헨리 아이링 교수와 운명적 만남을 갖게 됐다. 두 사람이 당시 함께 연구한 쌍극자 능률 계산에 대한 논문은 화학분야에 양자역학을 도입한 첫 사례라는 평가를 받고 있다.

그는 불모지나 다름없는 한국 화학의 초석을 놨다. 1945년 해방 직후 일본에서 잠시 귀국한 그는 서울대의 전신인 경성대 이공학부장과 서울대 문리대 학장으로서 학문 연구와 교육 정착을 위해 노력했다. 1946년에는 대한화학회(옛 조선화학회)를 창립했다.그는 1992년 10월26일 대전 KAIST 연구실에서 퇴근한 후 별세했다. 정부는 화학 발전의 초석을 닦은 공적을 인정해 그를 서울 국립현충원에 안장하기로 결정했다. 그가 유품으로 남긴 액자에는 그의 평생의 신념인 ‘예리한 관찰과 끊임없는 노력’이란 문구가 적혀 있다.
박근태 기자 kunta@hankyung.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