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경포럼] 장수 CEO가 사라진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
장수 최고경영자(CEO)가 점점 희귀해지고 있다. 정치바람을 타는 공기업 CEO야 성과와 무관하게 단임이 공식이 된 지 오래다. 정권 교체기면 1~2년짜리 공기업 CEO도 부지기수다.

4대 그룹에도 10년 이상 장수 CEO를 손에 꼽는다. 삼성은 2010년 이후 승진한 CEO들이 주축이다. 16년을 재임한 윤종용 부회장 이후 세대 교체의 결과다. 현대자동차와 SK는 연임하면 장수한 축에 든다. 그나마 보수적인 LG에 박진수(화학), 차석용(생활건강), 권영수(유플러스) 등 CEO로 10년을 넘긴 ‘부회장 3인방’이 있다. 유통 제약 식품쪽은 비교적 장수하는 편이지만 위기 국면인 주력 산업의 경우엔 임기를 장담할 수 없다.연임만 해도 장수 CEO

금융권은 더하다. 주인 없는 은행에선 3년 단임이 기본이다. 말로는 ‘고객 우선’이지만 매일 아침 전국 수백 개 점포의 영업성적표를 지점장들 책상에 들이미는 게 현실이다. 무슨 금융혁신이 일어나겠나 싶다. 증권계는 CEO 임기가 ‘2+1년’이 대세다. 최장수라는 유상호 한국투자증권 사장도 9연임인데 재직기간은 10년이 채 안 된다. 대부분 사장들이 임기 2~3년의 ‘깔딱고개’를 못 넘긴다. 증시가 6년째 ‘박스피’에 갇혀 단타와 작전이 난무하는 게 전혀 무관치 않을 것 같다.

‘직업이 사장’이라는 전설들이 사라진 이후 CEO 수명이 부쩍 짧아졌다. 되기도 어렵지만 올라가도 고용 안정성이 바닥이다. 30대 그룹 상장사 CEO의 평균 재임기간이 2.6년에 불과하다. 경영 일관성, 적극 투자, 장기 비전을 요구하기 민망한 수준이다. 미국 500대 기업의 CEO 평균 재임기간이 9.7년인 것과 극명하게 대비된다.CEO의 단명은 무엇보다 저성장 속에 실적을 올리기 어려운 데 원인이 있다. ‘빠른 추격자’ 전략은 한계에 봉착하고 선도자는 요원한 탓이다. 그렇더라도 CEO가 경기 부침에 대처해 뭔가 해볼 기회도 없이 단기실적에 따라 파리 목숨인 것은 사회 전반에 팽배한 조급증을 반영하는 듯하다.

대규모 투자 결정은 대주주인 오너의 ‘결단’이 필수다. 과거 창업자가 실패하면 ‘도전’이었지만 지금 2, 3세가 실패하면 ‘능력 부족’으로 낙인 찍힌다. 돌다리도 두들겨 보고 안 건너는 게 상책이 되고 말았다.

규제·조급증에 기업인 왜소해져장수 CEO가 줄어드는 데는 여의도 삼류 정치의 역할도 지대하다. 국정감사 때마다 기업인을 불러다 군기 잡고 연봉 공개도 모자라 ‘최고임금제’까지 도입하자는 국회다. 기업과 기업인의 가치 창출을 이해 못하면서 마르크스의 노동가치설 수준의 규제를 양산한다. 20대 국회가 불과 두 달 반 새 쏟아낸 입법안 1300건의 태반은 기업을 옥죄고 부담을 늘리는 것들이다.

정부는 정부대로 조급증에 빠져 있다. 일자리 조급증, 경기부양 조급증에다 노벨상 시즌엔 노벨상 조급증, 알파고 열풍 때면 인공지능(AI) 조급증이다. 연구개발(R&D) 예산으로 10년간 100조원을 쓰고도 내로라할 만한 성과가 눈을 씻고 봐도 없다. 왜 창의와 혁신이 실종됐는지 진지한 고민과 분석 없이 80~90년대식으로 기업만 닦달한다고 될 일이 아니다.

기업인이 위축된 나라에서 경제 활력이 살아날 리 만무하다. 글로벌 플레이어들을 비좁은 국내 시장에다 억지로 꿰맞추고 반(反)기업정서에 편승할수록 CEO들의 역량은 왜소해질 수밖에 없다. 10년, 20년 장수 CEO가 늘어날 때 경제도 되살아난다고 말할 수 있을 것이다.

오형규 논설위원 ohk@hankyung.com